청학동 도인과 빨치산이 넘던 고개
회남재를 오르는 길목. 뒤편으로 악양들이 협곡 사이로 길게 흐르고 구재봉(774m)이 뾰족하다
전설과 속설에 따르면 지리산에서 가장 깊은 곳은 도교풍의 청학동이다. 지리산 남쪽 삼신봉(1355m) 아래, 횡천강 최상류에 자리한 청학동은 전란을 피하고 도를 닦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어 만들어진 마을이다. 이들이 가끔 속세로 다니던 길목이 바로 회남재로, 6․25를 전후해서는 빨치산(파르티잔)들이 오르내리던 생사의 갈림길이기도 했다
지리산은 그 품이 얼마나 넓은지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비경이 어딘가 숨어 있고, 호랑이가 출몰한다는 얘기가 사실처럼 떠돈다. 이 지리산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은 수치 비교를 떠나서 정서적으로는 청학동이라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청학동은 신선과 학이 노니는 이상향으로 전란이 미치지 못하는 속세와 먼 곳을 의미한다.
공원으로 단장된 동정호. 출렁다리 뒤에 한산사가 높직하고 그 뒤 평탄한 봉우리에 고소성이 있다. 능선 맨오른쪽은 형제봉(1116m)
현실의 청학동(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역시 참으로 깊다. 세석평전에서 남쪽으로 뻗어난 지리산 남부능선은 삼신봉(1355m)에서 기세를 솟구친 다음 남녘의 들판을 향해 서서히 고개를 숙여 간다. 청학동은 삼신봉 바로 아래 해발 800m 지점에 있으며, 횡천강의 최상류다. 여기서 계곡 초입인 횡천까지 장장 28㎞의 기나긴 골짜기가 흘러내린다. 교통이 불편하던 그 옛날 28㎞의 골짜기를 거슬러 오르는 것은 사실상 완벽한 단절과 고립을 뜻했을 것이다.
이상향을 꿈꾸었던 청학동 도인들이지만 속세를 아예 멀리 하지는 않았다. 그들도 사람이기에 자급자족에는 한계가 있어 생필품을 구하려면 마을로 내려와야 했는데, 횡천강 계곡길은 너무 멀었다. 다행히 남도의 물산이 집결하는 화개장터와, 들판이 넓은 악양이 산 너머에 있어 회남재만 넘어가면 되었다.
‘회남(回南)’은 조선 초기의 유학자 남명 조식(1501~1572)이 지금의 산청 시천면에 머물 때 악양의 빼어난 풍광을 보러 왔다가 이곳에서 돌아갔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시천은 회남재의 북쪽이니 ‘남쪽으로 돌아갔다’는 회남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남명의 방문이 사실이라면, 길이 멀더라도 평탄한 외곽으로 악양에 들렀다가 지름길인 회남재로 귀가하려다 산이 너무 험해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고 이해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논물에 비친 부부소나무가 정답다. 소나무 왼쪽 뒤로 오목한 회남재가 보인다
회남재 남쪽의 악양 역시 지리산에서 참 특별한 곳이다. 삼면은 거대한 지리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섰고, 한쪽은 섬진강이 흘러내리는 삼각형 골짜기 지형에 꽤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평지가 드문 지리산 근방에서 이 골짜기의 들녘마저 매우 귀한 존재다. 박경리의 대표작 <토지>의 무대가 바로 여기다.
들이 넓고 비옥해서 예부터 지리산 근방에서는 풍족한 땅으로 알려졌고 악양(岳陽), 고소성, 한산사, 동정호 등 귀에 익은 중국 지명은 삼국시대 통일전쟁 당시 이곳에 주둔한 당나라 군사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보다는 모화사상으로 중국 문물을 동경한 조선 선비들의 작명이 유력하지 않은가 싶다. 악양과 동정호는 중국 양자강 중류인 호남성에 있고, 고소성과 한산사는 물의 도시로 유명한 강소성 소주에 실재한다. 모두 경치가 뛰어나고 운치 있는 곳으로, 유명한 당시(唐詩)의 소재로도 등장하는 명승지들이다. 규모는 중국과 다르지만 이곳 악양의 풍경도 평범하지 않다.
고소성, 한산사, 동정호 모두 <토지>의 무대가 된 평사리에 있으며, 한산사 근처에는 <토지> 드라마 촬영을 위해 최참판댁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집들이 복원되어 있어 <토지>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박경리는 “우연히 악양을 지나다 경치가 너무 좋아 소설의 무대로 삼았다”고 생전에 밝힌 일이 있다.
이 매혹적인 땅인 악양에서 청학동 가는 고개가 바로 회남재다. 해발 10m 남짓한 평사리에서 바라보는 750m 높이의 회남재는 까마득한 고지다. 평사리에서 회남재까지 13㎞, 청학동까지는 거의 20㎞에 이른다. 옛날에는 종일 걸어야 할 거리다.
악양들 농로를 따라 회남재로 향한다. 섬진강변이라 고도가 워낙 낮아 왼쪽 멀리 오목한 회남재가 참으로 높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또 하나 회남재의 매혹은 6․25를 전후해 지리산에서 암약한 빨치산들의 주요길목이라는 점이다. 지리산 빨치산은 적군이라는 이념적 잣대를 들어내면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절박한 환경에 처했던 사람들이란 점에 주목하게 된다. 그들이 남긴 수기를 보면 이건 도저히 인간의 생활이 아니다. 시시각각 조여드는 추격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한겨울 엄동설한을 불도 없는 산속에서 보내고, 단 몇 시간만에 지리산 이쪽에서 저쪽까지 짐승에게도 들키지 않고 주파하는 기동성까지, 그들은 차라리 지리산에 길들여진 야생인간이었다.
대표적인 빨치산 수기인 이태의 ‘남부군’을 보면 먹을 것이 부족한 빨치산들은 산 아래 민가에서 양식을 약탈했는데, 그나마 풍족한 악양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짐꾼으로 끌려간 농민들 중에는 ‘산사람’들의 협박과 회유에 끌려 본의 아니게 빨치산이 된 경우도 많았다. 빨치산에게 이 회남재는 죽음의 공포가 어른거리지만 동시에 따뜻한 밥상도 아른거리는 치명적인 유혹이었고, 그들에게 끌려간 농민에게는 회한의 고개였으며, 빨치산을 잡기 위해 매복한 국군에게는 공포와 피로가 교차하는 전선이었다.
악양들에서 올려다본 형제봉. 창공에 걸린 듯한 신선대 구름다리도 보인다
이제 회남재는 세상의 모든 길이 포장되고 있을 때 아직도 비포장으로 남아 두바퀴를 부른다. 자동차를 가진 사람들은 수십㎞를 둘러가더라도 이 험한 흙길을 넘을 이유가 없어졌고, 등산객들은 이 멀고 따분한 길을 걸어오를 동기를 찾기 어렵다.
악양과 청학동, 이 매혹적인 지리산의 두 명소를 잇는 길목이라는 점만으로도 회남재는 다시금 현대판 ‘산사람’을 부르고 있다.
출발지는 악양들 초입의 동정호. 한때는 작은 저수지였는데 어느새 출렁다리와 정자, 산책로 등이 갖춰진 호수공원으로 일변했다.
바로 옆 들판 가운데 작은 언덕에는 부부소나무나 정겹다. 비슷한 형상, 크기가 모여 있으면 우리는 흔히 부부, 형제, 남매 등으로 이해하고 이름붙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시각일 뿐. 이름과 선입견을 걷어내면 그곳에는 무정한 자연물만 덩그러니 남는다. 이런 언어 이전의 실상(實像)을 직면하는 것이 구도행(求道行)의 첫 단계다.
격자형으로 잘 정리된 들판을 따라 북상하며 점점 고도를 높여간다. 회남재는 까마득히 멀고 높아 과연 오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악양들 상류의 등촌리에서 엄청난 수량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수. 풍부한 물은 악양들의 풍요를 뒷받침한다
말굽 모양 계곡지형인 악양 최상류의 다랭이논을 오른다. 경사가 엄청난 이런 사면에서 논밭을 일구고 살려면 고역을 감내해야겠지만 땅이 넓고 물이 풍족하니 굶주릴 걱정은 없었을 것이다. 다랭이논을 끝으로 중기마을을 벗어나면 회남재 고갯길에 합류한다. 차곡차곡 올라왔더니 어느새 해발 340m나 되지만 아직 정상은 한참 위다. 고갯길은 멀쩡한 2차로이고 1047번 지방도이기도 하지만 통행량은 거의 없다. 이제 저 아래로 악양들이 잠겨 보이고 주변을 둘러싼 봉우리들이 한층 헌칠하게 다가온다. 형제봉과 활공장은 바로 옆으로 쏟아질 듯 급준하다. 산은 고지대에서 바라봐야 경사면까지 입체화되어 한층 웅장하게 느껴진다
첩첩한 다랭이논부터 악양들은 시작된다
중기마을을 지나면 오목한 안부의 회남재가 성큼 다가선다. 그래도 갈 길이 아득하다지리산 주릉을 볼 수 있는 형제봉 활공장(1095m, 오른쪽 위)이 모습을 드러냈다. 왼쪽 봉우리가 형제봉 정상
해발 530m 지점에서 아스팔트 포장은 끝나고 이후에는 좁은 시멘트길이다. 여기서 회남재까지는 2km 남짓이고, 고갯마루 직전에서 해발 770m까지 올라갔다가 회남재로 내려선다. 고개 정상에는 예전에는 없던 정자(回南亭)가 들어서 있고 이정표도 잘 정비되었다. 회남정은 전통적인 정자 형태인데 난간을 두르고 안쪽을 향해 앉는 자리를 배치해 아주 불편한 구조다. 최근 만든 정자는 이런 방식이 많은데, 안쪽을 향해 앉으니 바깥 풍경을 보기 어렵고 자세도 불편하다. 아예 난간을 없애 바깥을 향해 걸터앉게 하거나 외부를 향해 벤치를 배치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길은 두 갈래인데 왼쪽은 청학동 오른쪽은 묵계리 하산로다. 길에는 청학동 출신 소녀 가수(김다현)의 이름이 붙었고 안내판에도 사진이 반겨준다. 15년 전에 왔을 때는 빨치산 토벌을 위해 국군이 잠복했던 안내문과 조형물이 있어서 살벌했다면 이제는 소녀가수가 환하게 웃고 있으니 분위기상으로는 격변이다.
높은 고개지만 옴폭한 안부에다 숲까지 울창해 남쪽 조망만 살짝 트인다. 지나온 악양들이 길게 흐르고 그 뒤에는 섬진강 백사장이 하얗다. 맨 뒤에는 조각구름을 걸친 억불봉(1008m)~백운산(1222m) 능선이 아득하다.
어느새 훌쩍 올라와 마을들은 저 아래로 가라앉았다. 오른쪽 숲 사이로 지나온 도로가 보인다마침내 회남재 정상이다. 전망대를 겸한 회남정이 들어서 있다
회남정에서 바라본 악양. 협곡 사이로 악양들이 길게 이어지고 하얀 섬진강 백사장 뒤로 광양 백운산 억불봉(1008m)이 조각구름을 붙잡고 있다
청학동 출신 소녀가수가 반겨주는 청학동 방면 숲길
지리산 곳곳에 나붙은 곰 조심 안내문. 사육장에서 한 마리만 탈출해도 난리가 나고 포획에 나서는데 아무리 지리산이라도 일부러 방사를 하다니...
회남재에서 청학동 입구 삼성궁까지 6.4km 숲길은 기복은 있으나 거의 등고선을 따른다. 그도 그럴 것이 삼성궁 입구가 해발 720m로 고도차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고개를 넘으면 다운힐이 기다린다는 상식적 기대감은 회남재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숲길에는 간혹 트레킹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특히 코너에서 조심해야 한다.
삼성궁은 평일인데도 대형버스로 찾아든 관광객이 엄청나다. 도교적 신선사상과 무속, 민족주의를 버무린 이색공간은 볼거리로는 각별하다.
‘청학동 도인촌’은 이미 옛말이 된 듯, 세련된 식당과 펜션이 즐비하고 건물도 현대화되었으며 도로는 번듯하다.
회남재에서 기대를 저버린 내리막은 지금부터 보상해준다. 하동호에 이르기까지 장장 13km가 거의 다운힐이다. 아스팔트의 안락한 승차감에 몸을 맡기고 순식간에 내려서니 어느새 거대한 하동호가 짙푸르다. 1993년 하동댐을 완공하면서 생겨났으니 30년이나 되었는데 어딘가 생경하다. 지리산에서 30년은 세월 축에 끼기도 어려운가.
삼신봉과 청학동에서 발원한 계곡수가 모였으니 하동호는 그냥 떠마셔도 좋을 것처럼 맑고 깨끗하다.
회남재에서 청학동 삼성궁 가는 숲길. 기복이 심하지 않은 등고선 길이지만 간혹 보행자가 있어 조심해야 한다
돌담과 돌 조형물이 많은 청학동 삼성궁 입구삼신봉 아래 해발 700~800m 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청학동 일원. 왼쪽이 내삼신봉(1355m), 오른쪽 암봉이 삼신봉(1291m)
청학동에서 하동호까지, 계곡수로 흐르는 횡천강을 따라 기나긴 다운힐이 이어진다청정 계곡수가 모인 하동호
하동호에서 안락한 다운힐은 끝이다. 하동호 서쪽으로 흘러드는 중이천을 따라 다시 급한 오르막이 시작된다. 악양들 동쪽 장벽을 이루는 깃대봉(983m)~칠성봉(906m) 사이 배티재를 넘어 악양으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산간협곡에도 용케 집과 경작지가 들어서 있는데, 해발 500m를 넘어가면 신기하게도 산중에 평탄한 대지가 나오면서 노은동 마을이 기적처럼 숨어 있다. 옛날부터 지리산 여기저기서 청학동과 피난지를 찾아 헤맸으니 가여운 백성들에게는 관청의 가렴주구와 외침에서 자유로운 이런 외진 땅이 복지였을 것이다. 서구에서는 산업혁명이 시작되던 18세기 중엽 이중환이 쓴 <택리지>조차 살기 좋은 곳의 조건으로 난을 피할 수 있는 외딴 곳을 들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의 여파는 100년 이상 이어졌다.
15년 전 노은동을 지날 때는 사람들이 보였는데 지금은 곳곳에 집은 있으되 인기척이 없다. 칩거한 노인들뿐이거나 별장으로 변했기 때문 같다.
배티재에는 고개 이름은 없고 작은 이정목만 서 있다. ‘해발 500m’로 표기되어 있으나 530m가 맞다. 이런 엉터리 고도표시가 너무 많아 반드시 지도로 확인해야 한다. 어쨌든 배티재에서 악양들까지는 고도차가 500m 가깝고 길이는 5.5km에 달하는 내리막이 기다린다. 신나는 다운힐 도중 악양들 서쪽을 막은 형제봉이 다시 시야를 가득 채우고, 들판은 점점 다가서는데 과열된 브레이크가 내지르는 비명만이 숲을 울린다. 고도를 낮추면 깃대봉에서 흘러내린 계곡 물소리가 모든 소음을 잠식해버린다.
하동호에서 중이천을 따라 올라 노은동 가는 길. 협곡 저너머 고지에 평지 마을이 숨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해발 500m 산중에 기적처럼 숨어 있는 노은동 들판. 맞은편 낮은 산줄기가 악양으로 넘어가는 배티재이고, 그 너머로 형제봉 북부 능선이 살짝 보인다
배티재 정상. 고도는 이정목과 달리 530m가 맞다. 악양들까지 고도차 500m, 길이 5.5km의 길고 급한 다운힐이 시작된다
배티재를 거의 내려온 중대리에서 뒤돌아본 고갯길. 산허리에 희미하게 길 흔적이 보이고, 오른쪽 중간 가장 낮은 지점이 고갯마루다
tip
초행이고 관심이 있다면 추가로 시간을 내서 악양의 명소인 최참판댁, 한산사, 고소성, 스타웨이 스카이워크와 청학동 삼성궁을 함께 보는 것도 좋겠다. 최참판댁 입구, 악양면소재지, 청학동에 식당과 가게가 있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하동 회남재 일주 53km
청학동 도인과 빨치산이 넘던 고개
회남재를 오르는 길목. 뒤편으로 악양들이 협곡 사이로 길게 흐르고 구재봉(774m)이 뾰족하다
전설과 속설에 따르면 지리산에서 가장 깊은 곳은 도교풍의 청학동이다. 지리산 남쪽 삼신봉(1355m) 아래, 횡천강 최상류에 자리한 청학동은 전란을 피하고 도를 닦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어 만들어진 마을이다. 이들이 가끔 속세로 다니던 길목이 바로 회남재로, 6․25를 전후해서는 빨치산(파르티잔)들이 오르내리던 생사의 갈림길이기도 했다
지리산은 그 품이 얼마나 넓은지 지금도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비경이 어딘가 숨어 있고, 호랑이가 출몰한다는 얘기가 사실처럼 떠돈다. 이 지리산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은 수치 비교를 떠나서 정서적으로는 청학동이라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청학동은 신선과 학이 노니는 이상향으로 전란이 미치지 못하는 속세와 먼 곳을 의미한다.
공원으로 단장된 동정호. 출렁다리 뒤에 한산사가 높직하고 그 뒤 평탄한 봉우리에 고소성이 있다. 능선 맨오른쪽은 형제봉(1116m)
현실의 청학동(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역시 참으로 깊다. 세석평전에서 남쪽으로 뻗어난 지리산 남부능선은 삼신봉(1355m)에서 기세를 솟구친 다음 남녘의 들판을 향해 서서히 고개를 숙여 간다. 청학동은 삼신봉 바로 아래 해발 800m 지점에 있으며, 횡천강의 최상류다. 여기서 계곡 초입인 횡천까지 장장 28㎞의 기나긴 골짜기가 흘러내린다. 교통이 불편하던 그 옛날 28㎞의 골짜기를 거슬러 오르는 것은 사실상 완벽한 단절과 고립을 뜻했을 것이다.
이상향을 꿈꾸었던 청학동 도인들이지만 속세를 아예 멀리 하지는 않았다. 그들도 사람이기에 자급자족에는 한계가 있어 생필품을 구하려면 마을로 내려와야 했는데, 횡천강 계곡길은 너무 멀었다. 다행히 남도의 물산이 집결하는 화개장터와, 들판이 넓은 악양이 산 너머에 있어 회남재만 넘어가면 되었다.
‘회남(回南)’은 조선 초기의 유학자 남명 조식(1501~1572)이 지금의 산청 시천면에 머물 때 악양의 빼어난 풍광을 보러 왔다가 이곳에서 돌아갔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시천은 회남재의 북쪽이니 ‘남쪽으로 돌아갔다’는 회남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남명의 방문이 사실이라면, 길이 멀더라도 평탄한 외곽으로 악양에 들렀다가 지름길인 회남재로 귀가하려다 산이 너무 험해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고 이해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논물에 비친 부부소나무가 정답다. 소나무 왼쪽 뒤로 오목한 회남재가 보인다
회남재 남쪽의 악양 역시 지리산에서 참 특별한 곳이다. 삼면은 거대한 지리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섰고, 한쪽은 섬진강이 흘러내리는 삼각형 골짜기 지형에 꽤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 평지가 드문 지리산 근방에서 이 골짜기의 들녘마저 매우 귀한 존재다. 박경리의 대표작 <토지>의 무대가 바로 여기다.
들이 넓고 비옥해서 예부터 지리산 근방에서는 풍족한 땅으로 알려졌고 악양(岳陽), 고소성, 한산사, 동정호 등 귀에 익은 중국 지명은 삼국시대 통일전쟁 당시 이곳에 주둔한 당나라 군사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보다는 모화사상으로 중국 문물을 동경한 조선 선비들의 작명이 유력하지 않은가 싶다. 악양과 동정호는 중국 양자강 중류인 호남성에 있고, 고소성과 한산사는 물의 도시로 유명한 강소성 소주에 실재한다. 모두 경치가 뛰어나고 운치 있는 곳으로, 유명한 당시(唐詩)의 소재로도 등장하는 명승지들이다. 규모는 중국과 다르지만 이곳 악양의 풍경도 평범하지 않다.
고소성, 한산사, 동정호 모두 <토지>의 무대가 된 평사리에 있으며, 한산사 근처에는 <토지> 드라마 촬영을 위해 최참판댁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집들이 복원되어 있어 <토지>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박경리는 “우연히 악양을 지나다 경치가 너무 좋아 소설의 무대로 삼았다”고 생전에 밝힌 일이 있다.
이 매혹적인 땅인 악양에서 청학동 가는 고개가 바로 회남재다. 해발 10m 남짓한 평사리에서 바라보는 750m 높이의 회남재는 까마득한 고지다. 평사리에서 회남재까지 13㎞, 청학동까지는 거의 20㎞에 이른다. 옛날에는 종일 걸어야 할 거리다.
악양들 농로를 따라 회남재로 향한다. 섬진강변이라 고도가 워낙 낮아 왼쪽 멀리 오목한 회남재가 참으로 높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또 하나 회남재의 매혹은 6․25를 전후해 지리산에서 암약한 빨치산들의 주요길목이라는 점이다. 지리산 빨치산은 적군이라는 이념적 잣대를 들어내면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절박한 환경에 처했던 사람들이란 점에 주목하게 된다. 그들이 남긴 수기를 보면 이건 도저히 인간의 생활이 아니다. 시시각각 조여드는 추격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한겨울 엄동설한을 불도 없는 산속에서 보내고, 단 몇 시간만에 지리산 이쪽에서 저쪽까지 짐승에게도 들키지 않고 주파하는 기동성까지, 그들은 차라리 지리산에 길들여진 야생인간이었다.
대표적인 빨치산 수기인 이태의 ‘남부군’을 보면 먹을 것이 부족한 빨치산들은 산 아래 민가에서 양식을 약탈했는데, 그나마 풍족한 악양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짐꾼으로 끌려간 농민들 중에는 ‘산사람’들의 협박과 회유에 끌려 본의 아니게 빨치산이 된 경우도 많았다. 빨치산에게 이 회남재는 죽음의 공포가 어른거리지만 동시에 따뜻한 밥상도 아른거리는 치명적인 유혹이었고, 그들에게 끌려간 농민에게는 회한의 고개였으며, 빨치산을 잡기 위해 매복한 국군에게는 공포와 피로가 교차하는 전선이었다.
악양들에서 올려다본 형제봉. 창공에 걸린 듯한 신선대 구름다리도 보인다
이제 회남재는 세상의 모든 길이 포장되고 있을 때 아직도 비포장으로 남아 두바퀴를 부른다. 자동차를 가진 사람들은 수십㎞를 둘러가더라도 이 험한 흙길을 넘을 이유가 없어졌고, 등산객들은 이 멀고 따분한 길을 걸어오를 동기를 찾기 어렵다.
악양과 청학동, 이 매혹적인 지리산의 두 명소를 잇는 길목이라는 점만으로도 회남재는 다시금 현대판 ‘산사람’을 부르고 있다.
출발지는 악양들 초입의 동정호. 한때는 작은 저수지였는데 어느새 출렁다리와 정자, 산책로 등이 갖춰진 호수공원으로 일변했다.
바로 옆 들판 가운데 작은 언덕에는 부부소나무나 정겹다. 비슷한 형상, 크기가 모여 있으면 우리는 흔히 부부, 형제, 남매 등으로 이해하고 이름붙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시각일 뿐. 이름과 선입견을 걷어내면 그곳에는 무정한 자연물만 덩그러니 남는다. 이런 언어 이전의 실상(實像)을 직면하는 것이 구도행(求道行)의 첫 단계다.
격자형으로 잘 정리된 들판을 따라 북상하며 점점 고도를 높여간다. 회남재는 까마득히 멀고 높아 과연 오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악양들 상류의 등촌리에서 엄청난 수량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수. 풍부한 물은 악양들의 풍요를 뒷받침한다
말굽 모양 계곡지형인 악양 최상류의 다랭이논을 오른다. 경사가 엄청난 이런 사면에서 논밭을 일구고 살려면 고역을 감내해야겠지만 땅이 넓고 물이 풍족하니 굶주릴 걱정은 없었을 것이다. 다랭이논을 끝으로 중기마을을 벗어나면 회남재 고갯길에 합류한다. 차곡차곡 올라왔더니 어느새 해발 340m나 되지만 아직 정상은 한참 위다. 고갯길은 멀쩡한 2차로이고 1047번 지방도이기도 하지만 통행량은 거의 없다. 이제 저 아래로 악양들이 잠겨 보이고 주변을 둘러싼 봉우리들이 한층 헌칠하게 다가온다. 형제봉과 활공장은 바로 옆으로 쏟아질 듯 급준하다. 산은 고지대에서 바라봐야 경사면까지 입체화되어 한층 웅장하게 느껴진다
첩첩한 다랭이논부터 악양들은 시작된다
중기마을을 지나면 오목한 안부의 회남재가 성큼 다가선다. 그래도 갈 길이 아득하다지리산 주릉을 볼 수 있는 형제봉 활공장(1095m, 오른쪽 위)이 모습을 드러냈다. 왼쪽 봉우리가 형제봉 정상
해발 530m 지점에서 아스팔트 포장은 끝나고 이후에는 좁은 시멘트길이다. 여기서 회남재까지는 2km 남짓이고, 고갯마루 직전에서 해발 770m까지 올라갔다가 회남재로 내려선다. 고개 정상에는 예전에는 없던 정자(回南亭)가 들어서 있고 이정표도 잘 정비되었다. 회남정은 전통적인 정자 형태인데 난간을 두르고 안쪽을 향해 앉는 자리를 배치해 아주 불편한 구조다. 최근 만든 정자는 이런 방식이 많은데, 안쪽을 향해 앉으니 바깥 풍경을 보기 어렵고 자세도 불편하다. 아예 난간을 없애 바깥을 향해 걸터앉게 하거나 외부를 향해 벤치를 배치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길은 두 갈래인데 왼쪽은 청학동 오른쪽은 묵계리 하산로다. 길에는 청학동 출신 소녀 가수(김다현)의 이름이 붙었고 안내판에도 사진이 반겨준다. 15년 전에 왔을 때는 빨치산 토벌을 위해 국군이 잠복했던 안내문과 조형물이 있어서 살벌했다면 이제는 소녀가수가 환하게 웃고 있으니 분위기상으로는 격변이다.
높은 고개지만 옴폭한 안부에다 숲까지 울창해 남쪽 조망만 살짝 트인다. 지나온 악양들이 길게 흐르고 그 뒤에는 섬진강 백사장이 하얗다. 맨 뒤에는 조각구름을 걸친 억불봉(1008m)~백운산(1222m) 능선이 아득하다.
어느새 훌쩍 올라와 마을들은 저 아래로 가라앉았다. 오른쪽 숲 사이로 지나온 도로가 보인다마침내 회남재 정상이다. 전망대를 겸한 회남정이 들어서 있다
회남정에서 바라본 악양. 협곡 사이로 악양들이 길게 이어지고 하얀 섬진강 백사장 뒤로 광양 백운산 억불봉(1008m)이 조각구름을 붙잡고 있다
청학동 출신 소녀가수가 반겨주는 청학동 방면 숲길
지리산 곳곳에 나붙은 곰 조심 안내문. 사육장에서 한 마리만 탈출해도 난리가 나고 포획에 나서는데 아무리 지리산이라도 일부러 방사를 하다니...
회남재에서 청학동 입구 삼성궁까지 6.4km 숲길은 기복은 있으나 거의 등고선을 따른다. 그도 그럴 것이 삼성궁 입구가 해발 720m로 고도차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고개를 넘으면 다운힐이 기다린다는 상식적 기대감은 회남재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숲길에는 간혹 트레킹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특히 코너에서 조심해야 한다.
삼성궁은 평일인데도 대형버스로 찾아든 관광객이 엄청나다. 도교적 신선사상과 무속, 민족주의를 버무린 이색공간은 볼거리로는 각별하다.
‘청학동 도인촌’은 이미 옛말이 된 듯, 세련된 식당과 펜션이 즐비하고 건물도 현대화되었으며 도로는 번듯하다.
회남재에서 기대를 저버린 내리막은 지금부터 보상해준다. 하동호에 이르기까지 장장 13km가 거의 다운힐이다. 아스팔트의 안락한 승차감에 몸을 맡기고 순식간에 내려서니 어느새 거대한 하동호가 짙푸르다. 1993년 하동댐을 완공하면서 생겨났으니 30년이나 되었는데 어딘가 생경하다. 지리산에서 30년은 세월 축에 끼기도 어려운가.
삼신봉과 청학동에서 발원한 계곡수가 모였으니 하동호는 그냥 떠마셔도 좋을 것처럼 맑고 깨끗하다.
회남재에서 청학동 삼성궁 가는 숲길. 기복이 심하지 않은 등고선 길이지만 간혹 보행자가 있어 조심해야 한다
돌담과 돌 조형물이 많은 청학동 삼성궁 입구삼신봉 아래 해발 700~800m 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청학동 일원. 왼쪽이 내삼신봉(1355m), 오른쪽 암봉이 삼신봉(1291m)
청학동에서 하동호까지, 계곡수로 흐르는 횡천강을 따라 기나긴 다운힐이 이어진다청정 계곡수가 모인 하동호
하동호에서 안락한 다운힐은 끝이다. 하동호 서쪽으로 흘러드는 중이천을 따라 다시 급한 오르막이 시작된다. 악양들 동쪽 장벽을 이루는 깃대봉(983m)~칠성봉(906m) 사이 배티재를 넘어 악양으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산간협곡에도 용케 집과 경작지가 들어서 있는데, 해발 500m를 넘어가면 신기하게도 산중에 평탄한 대지가 나오면서 노은동 마을이 기적처럼 숨어 있다. 옛날부터 지리산 여기저기서 청학동과 피난지를 찾아 헤맸으니 가여운 백성들에게는 관청의 가렴주구와 외침에서 자유로운 이런 외진 땅이 복지였을 것이다. 서구에서는 산업혁명이 시작되던 18세기 중엽 이중환이 쓴 <택리지>조차 살기 좋은 곳의 조건으로 난을 피할 수 있는 외딴 곳을 들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의 여파는 100년 이상 이어졌다.
15년 전 노은동을 지날 때는 사람들이 보였는데 지금은 곳곳에 집은 있으되 인기척이 없다. 칩거한 노인들뿐이거나 별장으로 변했기 때문 같다.
배티재에는 고개 이름은 없고 작은 이정목만 서 있다. ‘해발 500m’로 표기되어 있으나 530m가 맞다. 이런 엉터리 고도표시가 너무 많아 반드시 지도로 확인해야 한다. 어쨌든 배티재에서 악양들까지는 고도차가 500m 가깝고 길이는 5.5km에 달하는 내리막이 기다린다. 신나는 다운힐 도중 악양들 서쪽을 막은 형제봉이 다시 시야를 가득 채우고, 들판은 점점 다가서는데 과열된 브레이크가 내지르는 비명만이 숲을 울린다. 고도를 낮추면 깃대봉에서 흘러내린 계곡 물소리가 모든 소음을 잠식해버린다.
하동호에서 중이천을 따라 올라 노은동 가는 길. 협곡 저너머 고지에 평지 마을이 숨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해발 500m 산중에 기적처럼 숨어 있는 노은동 들판. 맞은편 낮은 산줄기가 악양으로 넘어가는 배티재이고, 그 너머로 형제봉 북부 능선이 살짝 보인다
배티재 정상. 고도는 이정목과 달리 530m가 맞다. 악양들까지 고도차 500m, 길이 5.5km의 길고 급한 다운힐이 시작된다
배티재를 거의 내려온 중대리에서 뒤돌아본 고갯길. 산허리에 희미하게 길 흔적이 보이고, 오른쪽 중간 가장 낮은 지점이 고갯마루다
tip
초행이고 관심이 있다면 추가로 시간을 내서 악양의 명소인 최참판댁, 한산사, 고소성, 스타웨이 스카이워크와 청학동 삼성궁을 함께 보는 것도 좋겠다. 최참판댁 입구, 악양면소재지, 청학동에 식당과 가게가 있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하동 회남재 일주 53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