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이 매일 바라본 그 천왕봉
주산 허리에서 바라본 천왕봉(1915m). 좌우로 제석봉(1808m)과 중봉(1875m)이 날개를 이뤄 창공으로 솟구치는 독수리 모습이다. 앞 오른쪽은 구곡산(961m)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1915m) 최고 조망대는 어딜까. 북쪽은 함양 마천 금대암과 오도재 아래 지리산조망공원을 들 수 있다. 남쪽에서 두바퀴로도 접근이 가능한 최고 조망대로 나는 주산(831m)을 꼽고 싶다. 천왕봉을 향한 북사면에 임도가 나 있어서 내내 천왕봉을 바라볼 수 있고, 시점 높이가 적당해 거대 산체의 위용과 첩첩 산줄기를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 주산보다 천왕봉에 더 가까운 구곡산(961m)이 더 낫겠지만 따로 장시간 산행을 해야 하고 임도가 없어 라이딩 불가다.
천왕봉 직하에서 발원하는 시천천과 덕천강 방면에서 바라보는 천왕봉 조망이 각별한 것은 선인들도 잘 알아서, 조선초기의 대유학자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이 바로 여기에 터 잡고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에 매진했다. 내면적 신념과 함께 의로운 실천을 강조한 남명답게 그의 제자 중에는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 50여명에 달하는 의병장이 나와 임진왜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익숙한 지형지리를 바탕으로 예측불허의 종횡무진 공격으로 왜군을 괴롭힌 의병 덕분에 왜군 활동은 크게 제약받았다. 남명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의병이 없었다면 내륙, 특히 민간 피해는 더욱 심했을 것이다. 남명의 제자들에게 전수된 이 같은 실천의지와 용기는 뭇 산을 거느리고 까마득히 솟은 천왕봉의 굳센 기세에 맥이 닿아 있다.
시천면소재지에 있는 남명기념관. 그의 생애와 사상, 유품을 볼 수 있다. 뒤쪽 언덕 위에 그의 묘가 있다
남명이 바라본 천왕봉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 그가 지냈던 산천재(山天齋)를 기점으로 잡는다. 산천재 옆에는 그의 생애, 저서 등을 소개한 남명기념관이 있고 기념관 뒤 언덕에 그의 묘가 있다.
천왕봉 기운을 받아 훌륭한 제자를 길러내 결과적으로는 임진왜란 승리에 큰 역할을 한 남명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기념관을 돌아본다. 정문에 들어서면 남명이 제시하는, 바람직한 내면과 도덕을 성곽으로 도식화한 ‘신명사도(神明舍圖)’가 걸려 있다. 직역하면 ‘정신을 밝히는 집 그림’ 정도가 되겠다. 그림의 중심에는 ‘경(敬)’이 있다. 항상 깨어 있는 마음으로 언행을 다스린다는 뜻이라는데, 그가 평생의 교훈으로 삼은 두 마디, ‘내면을 밝히는 것은 경(內明者敬), 바깥으로 결단하는 것은 의(外斷者義)’ 글귀도 씌어 있다. 그 옆에 걸린 복잡다단한 학맥도(學脈圖)를 보면 남명이 얼마나 많은 제자를 길렀고 또 후대까지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잠깐, 남명이 근거하고 있는 성리학에 대해 대략 살펴보고 넘어가자. 성리학은 조선 500년을 지배한 세계관이자 도덕이고 지금도 그 영향력이 막대하다. 성리학은 12세기 이후 동아시아 전체에 파급되었지만 특히 조선에서 굳건한 지위를 유지하고 나중에는 중세 기독교처럼 범접불가의 금과옥조가 되었다. 특히 조선이 모범으로 삼은, 성리학 기반의 명나라가 북방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 멸망하면서 성리학의 원류는 조선으로 이어졌다고 믿었다.
성리학이 추구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는 왕 자신의 도덕성과 학문을 중시하는 일종의 ‘철인정치’인데, 명 멸망 후 이 성리학적 왕도정치는 조선에서만 명맥을 잇고 있고 또 완전체라고 믿었다. 때문에 성리학적 세계관과 다른 사문난적(斯文亂賊, ‘성현의 글’을 어지럽히는 적)을 용서할 수 없었고, 동시에 다른 모든 나라는 성현의 가르침을 모르는 오랑캐이니 통상할 필요가 없어 조선은 쇄국으로 치닫게 된다. 결국 세계사에서 동떨어진 조선은 패망의 길로 가고 마는데, 이 현상은 기이하게도 현대 북한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주자성리학을 주체사상이나 김일성 수령주의로 대치하면 모든 것이 판박이다. 배타적 근본주의에서 유사하기 때문이다.
기념관을 들어서면 바로 마주치는 '신명사도'. 성벽 안은 내면을 상징하며, 중심에 경이 있다. 오른쪽과 왼쪽 글귀는 '스스로를 밝히는 것은 경, 바깥으로 결단하는 것은 의'라는 뜻
남명의 학맥도. 숱한 제자를 길러낸 그의 학맥은 20세기 중반까지 유력 학자들에게 이어질 정도로 영향력이 엄청나다
성리학은 공자에서 시작된 유학을 계승하지만 내용은 좀 다르다. 원시 유학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극기복례(克己復禮)’ - ‘자아(이기심과 욕망)를 극복해 예를 회복한다’는 것으로 일종의 도덕론이자 윤리학이다. 일반 종교에서 반드시 다루는 삶과 우주, 존재의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은 없었는데 공자 스스로도 경험세계를 초월하는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괴력난신은 신기한 것, 초인적인 능력, 반란, 귀신 등 초월적인 현상이나 전통을 거스르는 것을 뜻한다. 이제 막 문명이 싹트고 자리 잡는 기원전 6세기, 춘추전국의 대혼란기에 국가간, 개인간 갈등 해소를 위해 ‘예’를 바탕으로 한 윤리의 정립은 무엇보다 시급했을 것이다.
하지만 심오한 형이상학 체계를 가진 불교와 현상 초월적인 도교가 확산되면서 유학은 여기에 대항할 형이상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11세기 북송의 정이(程頤)가 <주역>을 바탕으로 세상을 이(理)와 기(氣)의 작용으로 해석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창안한다. 거칠게 보아, 이(理)가 원리 혹은 이치라면 기(氣)는 감각이나 그 대상인 물질이다. 이는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유사한데, 이(理)를 만물의 원형인 이데아(idea)에 비유할 수 있다. ‘빨갛고 둥글고 달콤한 과일’이라는 특징을 가진 ‘사과’라는 이데아가 별도로 있고, 개별 사과는 이 이데아의 발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형형한 눈빛과 단아한 자세에서 한치의 틈도 허락지 않는 남명의 강직함을 엿볼 수 있다
남송의 주희(朱熹, 1130~1200)는 이기이원론을 받아들여 인간과 우주만물을 설명하는 성리학을 집대성한다. 주희는 성인에게 붙이는 경칭을 더해 ‘주자(朱子)’로 존경받으면서 그가 체계화한 유학은 ‘주자성리학’으로도 불리게 된다.
성리학은 원시 유학의 도덕론을 넘어, 만물뿐 아니라 인간 정신과 도덕, 사회와 국가의 원리까지 해명한다. 일찍이 <대학(大學)>에서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8조목을 선비가 일생 동안 완수해야 할 일의 순서로 내세웠다. 이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의 방법론으로 제시한 12연기와 흡사한데, 12연기는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순이다. 이를 역순으로 보면, 괴로움의 원천인 늙어 죽음은 태어나기(生) 때문이고, 태어난 것은 존재하기 때문이며, 존재는 취해서이며… 이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무명이 최초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무명을 타파하면 종국에는 늙고 죽는 문제까지 해결된다는 것이다.
남명이 기거하며 제자를 양성한 산천재.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작은 규모다. 주련에는 이곳을 택한 이유를 시로 읊은 내용이 걸려 있다
12연기가 개인적 구도 차원이라면, 대학의 8조목은 사회적이다. 천하가 태평하려면 나라가 잘 다스려져야 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집안을 잘 관리해야 하며… 가장 먼저 ‘사물의 이치를 알아야(格物)’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논리다.
결국 격물치지(格物致知)는 최초의 실천론이자 목표가 된다. 이 격물치지의 해석이 성리학의 발단이 된다. <대학>에서 말한 원래의 격물은 ‘격(格)’ 의미 그대로 사물의 순서, 위상 등의 파악을 뜻했으나 주자는 보다 폭을 넓혀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면 앎에 이른다’고 풀이해, 인간의 본성(本性)은 이미 하늘의 이치를 품고 있다는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했다. 한편 16세기 명나라 때의 학자 왕양명은 이 ‘격’을 올바른 지식(良知)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을 어지럽히는 물욕을 없애야 한다고 풀이해 ‘심즉리(心卽理)’를 제시했다.
주자성리학과 양명학은 조선 선비들의 가치관과 언행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남명의 사상 역시 이 틀에서 보면 이해가 쉽다. 남명이 중시한 경(敬)은 격물치지에서 수신까지 내면의 성찰과 태도의 원리라면, 의(義)는 '제가 치국 평천하'에 해당하는 외면적 행동원리로 볼 수 있다. 이는 학문과 무예 모두가 중요하다는 ‘문무병중(文武竝重)’으로 실현되어 제자들의 의병 활동으로 구체화된다.
산천재 중앙에 걸려 있는, 남명 사상의 핵심 경과 의. 내면은, 경의 마음으로 엄숙하고 강직하며 깨어있는 태도를 견지하고, 외면은 의를 위해 이익과 생명까지 내버려야 한다는 행동원리를 말하고 있다
경(敬)은 내 안에 있는 순수한 정신을 찾아가는 수양 방법으로 몸가짐을 엄숙히 하고 마음을 한결같이 유지해 삿된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의(義)는 밖으로 사심 없이 의로운 언행을 추구하는 것이니 경과 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눈빛이 형형하고 곧은 자세의 남명 초상화만 봐도 신념에 어긋나면 목숨도 불사하는 강직한 선비의 모습이 상상된다. 언제나 빈 틈 없는 자세와 태도를 유지했음이 분명하다. 이런 개인수양 방식은 불교의 선(禪), 도교의 무위자연에서 영향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신명사도’에도 있듯이 남명은 경(敬)을 견지하기 위해 항상 맑게 깨어 있는 ‘성성(惺惺)’의 태도를 유지했으며, 평소에도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과 ‘경의검(敬義劍)’이라는 칼을 차고 다니며 스스로를 깨우치고 경계했다. 기념관에는 그가 패용했던 방울과 칼이 전시되어 있는데, 길이 25cm 정도 되는 단검의 서슬 퍼런 날은 정신을 번쩍 깨운다. 극단적으로 치열한 자기 각성과 경계의 노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산천재에서 바라본 천왕봉. 뭇산들을 거느리고 창공으로 솟구친 위용이 굉장하다. 남명은 이 모습을 매일 바라보며 천왕봉의 기상을 흠모했을 것이고, 학자로서의 그는 천왕봉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앞의 건물은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남명은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처사(處士)로 지냈으나 왕에게 직언하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고, 사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기념관 바로 맞은편 덕천강변에는 남명이 기거하며 제자를 양성한 산천재가 있다. 첩첩한 산줄기 너머로 하늘 높이 치솟은 천왕봉을 바라보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팔작지붕 건물로, 기둥에 붙은 주련에는 이곳을 택한 이유를 밝힌 남명의 시가 걸려 있다.
봄 산 어딘들 향기 나는 풀 없을까마는(春山底處無芳草)
다만 하늘나라 곁 천왕봉에 살기 좋아서라네(只愛天王近帝居)
빈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 살 건가(白手歸來何物食)
은하처럼 맑은 물 십리나 되니 먹고도 남겠네(銀河十里喫有餘)
(필자 역)
역시 남명은 천왕봉을 사랑하고 의식해서 이 자리를 택한 것이다. 산천재에서 보는 천왕봉이 특히 웅장하고 높은 것은 고도가 100m밖에 되지 않아 엄청난 비고의 산체를 직면하기 때문이다. 남명의 호(號)는 ‘남쪽의 어두운 처사(南冥)’라고 겸양하지만 저 천왕봉처럼 세상 위로 우뚝한 정신세계를 갈망했고 또 자부했음이 틀림없다.
천왕봉을 만나러 가는 길목에서, 500년 전 날마다 천왕봉을 보며 스스로를 가다듬고 사색했던 남명의 사상을 장황하게 짚어본 것은 그 여운에 조금이라도 가피를 입고, 그의 생각에 일말의 동감이라도 얻기 위해서다.
덕천강을 건너는 징검다리. 물이 많을 때는 상류의 천평교로 우회해야 한다. 오른쪽에 마주 보이는 산은 구곡산(961m)
남명기념관에서 맞은편 마을을 통과해 덕천강으로 내려서면 징검다리가 있다. 다소 불편하지만 자전거를 들며 끌며 징검다리를 건넌다. 물이 많고 급류가 심할 때는 1.5km 상류의 천평교를 건너 우회해야 한다.
길은 오대주산(643m)과 비룡산(555m) 사이 골짜기를 향해 경사도 10%로 가파르게 파고든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북향의 협곡에도 민가는 한참 상류까지 주저리주저리 이어진다. 마지막 민가를 지나 중태재(450m)를 넘어가면 갑자기 조망이 트이면서 주산이 거대한 덩치로 앞을 막고, 북쪽으로는 거림골 방면이 한없이 깊은데 맨 뒤에는 천왕봉에서 세석평전에 이르는 지리산 주릉이 웅자를 드러낸다. 고지에서 바라보는 산악미의 입체감과 지형적 박력이 대단하다.
59번 국도가 지나는 갈현(395m)을 지나면 이제 주산 허리로 접어든다. 주산 기슭 훌쩍 높이까지 송전탑이 지나는데 이는 산청양수발전소에서 발전한 전기를 옮기는 전력망이다. 주산 북서쪽 고운동계곡에 들어선 상부저수지와 북쪽 거림골 입구 내대천 사이에 조성된 하부저수지 간 고도차(427m)를 활용해 발전한다. 심야의 남는 전기로 하부저수지의 물을 상부로 퍼 올렸다가 낮에는 상부저수지 물을 떨어뜨려 발전하니 마치 ‘영구기관’처럼 물을 재활용하니 대단히 효율적이다.
국내는 산악지대가 많아 전국에 16곳의 양수발전소가 있는데 현장을 볼 때마다 산꼭대기에 조성한 거대 저수지와 수백m에 달하는 수직 도수관을 어떻게 뚫었는지 토목기술에 감탄한다. 소위 ‘문과 먹물’들은 정치 경제 문화계를 장악한 자신들이 세상을 설계하고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세상을 바꾸고 일상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엔지니어와 과학자다.
오대주산(643m)과 비룡산(555m) 사이 골짜기를 향해 경사도 10% 길이 가파르게 이어진다. 북향의 협곡임에도 민가는 한참 상류까지 산재한다
중태리 협곡 상류에도 돌아본 모습. 골짜기 상류까지 민가가 드문드문 있고 맨 뒤로 웅석봉(1099m)이 보인다
59번 국도가 지나는 갈현(395m). 오른쪽 임도로 들어서면 주산 기슭이 시작된다
임도는 지리산 둘레길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주산 자체가 등산지로 별로 알려져 있지 않고 찾는 이가 드문 듯 길과 숲은 원시적인 분위기가 충만하다. 깊은 숲에 ‘곰 출몰주의’ 안내문이 어색하지 않지만 가장 한심한 실책에 실소와 공포감이 동시에 인다. 일부러 방사해 놓고 조심하라니…. 산악에 들면 멧돼지와 풀린 개가 가장 두려운데 곰까지 걱정해야 하다니.
길은 계속 업힐이다. 정상 바로 북쪽 능선을 지나면서 해발 670m 코스 최고점에 이르고, 북릉을 돌아서면 그제야 천왕봉이 간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껏 이렇게 웅장한 천왕봉의 전모를 본 적이 없다. 산을 오르면 봉우리 일부만 볼 수 있지만 여기서는 바닥부터 정상까지, 수많은 지능선과 골짜기의 최종 수렴지로서 천왕봉의 위용이 실감된다. 천왕봉 상공에 표류하는 한 조각 구름이 고도감과 웅장미를 더해준다. 앞서 구례 지초봉에서도 말했지만, 산은 허리춤 높이에서 바라봐야 경사면까지 입체화되어 한층 웅장해 보인다. 주산은 천왕봉을 바라보기에 최적의 위치와 높이를 갖춘 셈이다.
원근에 따라 농담을 달리하는 겹겹의 산줄기 너머로 독수리 날갯짓 모습으로 치솟은 천왕봉은 옛사람이 ‘하늘의 왕(天王)’이라고 명명할 만하다. 남명은 천왕을 천제(天帝) 가까운 곳이라고 읊었는데, 아무리 높고 웅장해도 산에 황제의 제(帝) 자는 붙이지 못했다. 주산이 임금 주(主)를 쓴 것도 천제-천왕-임금의 순차를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원시적인 느낌마저 드는 주산 허리길. 대체로 북사면이라 해가 잘 들지 않는다
고운동계곡 상류의 무시무시한 협곡 맨 위에 자리한 산청양수발전소 상부저수지 댐이 참으로 신통스럽다. 송전선은 산청양수발전소의 전기를 옮기는 전력망이다. 오른쪽 멀리 천왕봉이 보인다
고운동계곡 방면으로 다운힐 시작이다. 시멘트 포장이 망가져 원시미가 풀풀하다. 오른쪽은 구곡산, 왼쪽 뒤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희미하다
바로 맞은편의 구곡산(961m)은 골짜기가 많다는 이름 그대로 숱하게 패인 급경사 능선과 협곡의 조화가 근육질 남성을 닮아 천왕봉을 수호하는 수문장 혹은 사천왕상처럼 험상궂다. 천왕봉은 구곡산보다 1000m나 더 높으니 가히 우주의 초입에 머리를 넣고 있는 것만 같다.
이제 다운힐 시작이다. 고운동계곡 협곡미도 굉장한데, 원시적인 풍광의 골짜기 상류에 살짝 보이는 양수발전소 상부저수지(해발 680m) 댐은 가히 비현실적이다.
배바위 기도도량부터는 고운동계곡을 따라 내내 다운힐이지만 민가가 하나둘 많아지면서 이윽고 반천리 마을을 스쳐간다. 반천리를 벗어나면 시천천을 건너 천왕봉 직하 중산리에서 내려온 20번 국도를 타고 시천면소재지로 향한다. 교통량은 다소 있으나 갓길이 넉넉하고 외공리에서는 강변 농로를 탈 수 있다. 남명을 제향하는 덕천서원을 지나면 일대에서 가장 큰 마을인 시천면소재지(덕산)이고, 남명기념관은 마을 끝에 있다.
전제왕조 시절,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음에도 왕을 꾸짖는 상소를 올리고 의기 충만한 제자들을 양성한 남명의 기상은 ‘책상붙이 탁상공론 당파’에 찌든 성리학의 문약(文弱)을 딛고 고고하다. 저 천왕봉이 남명의 기상을 키운 것을 이제 분명히 알겠다.
반천리 하산길에 뒤돌아본 주산. 임도는 산 중턱에 듬성듬성 서 있는 송전탑을 옆을 지난다
시천천 둑길을 따라 남명기념관으로 되돌아가는 길
tip
남명기념관과 산천재 입구에 무료주차장이 있으며 시천면소재지에 식당, 편의점이 모여 있다. 중태재 업힐 때는 마지막 갈림길에서 길찾기에 주의한다(U턴식 우회전).
산청 주산 일주 30km
남명이 매일 바라본 그 천왕봉
주산 허리에서 바라본 천왕봉(1915m). 좌우로 제석봉(1808m)과 중봉(1875m)이 날개를 이뤄 창공으로 솟구치는 독수리 모습이다. 앞 오른쪽은 구곡산(961m)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1915m) 최고 조망대는 어딜까. 북쪽은 함양 마천 금대암과 오도재 아래 지리산조망공원을 들 수 있다. 남쪽에서 두바퀴로도 접근이 가능한 최고 조망대로 나는 주산(831m)을 꼽고 싶다. 천왕봉을 향한 북사면에 임도가 나 있어서 내내 천왕봉을 바라볼 수 있고, 시점 높이가 적당해 거대 산체의 위용과 첩첩 산줄기를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 주산보다 천왕봉에 더 가까운 구곡산(961m)이 더 낫겠지만 따로 장시간 산행을 해야 하고 임도가 없어 라이딩 불가다.
천왕봉 직하에서 발원하는 시천천과 덕천강 방면에서 바라보는 천왕봉 조망이 각별한 것은 선인들도 잘 알아서, 조선초기의 대유학자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이 바로 여기에 터 잡고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에 매진했다. 내면적 신념과 함께 의로운 실천을 강조한 남명답게 그의 제자 중에는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 50여명에 달하는 의병장이 나와 임진왜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익숙한 지형지리를 바탕으로 예측불허의 종횡무진 공격으로 왜군을 괴롭힌 의병 덕분에 왜군 활동은 크게 제약받았다. 남명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의병이 없었다면 내륙, 특히 민간 피해는 더욱 심했을 것이다. 남명의 제자들에게 전수된 이 같은 실천의지와 용기는 뭇 산을 거느리고 까마득히 솟은 천왕봉의 굳센 기세에 맥이 닿아 있다.
시천면소재지에 있는 남명기념관. 그의 생애와 사상, 유품을 볼 수 있다. 뒤쪽 언덕 위에 그의 묘가 있다
남명이 바라본 천왕봉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 그가 지냈던 산천재(山天齋)를 기점으로 잡는다. 산천재 옆에는 그의 생애, 저서 등을 소개한 남명기념관이 있고 기념관 뒤 언덕에 그의 묘가 있다.
천왕봉 기운을 받아 훌륭한 제자를 길러내 결과적으로는 임진왜란 승리에 큰 역할을 한 남명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기념관을 돌아본다. 정문에 들어서면 남명이 제시하는, 바람직한 내면과 도덕을 성곽으로 도식화한 ‘신명사도(神明舍圖)’가 걸려 있다. 직역하면 ‘정신을 밝히는 집 그림’ 정도가 되겠다. 그림의 중심에는 ‘경(敬)’이 있다. 항상 깨어 있는 마음으로 언행을 다스린다는 뜻이라는데, 그가 평생의 교훈으로 삼은 두 마디, ‘내면을 밝히는 것은 경(內明者敬), 바깥으로 결단하는 것은 의(外斷者義)’ 글귀도 씌어 있다. 그 옆에 걸린 복잡다단한 학맥도(學脈圖)를 보면 남명이 얼마나 많은 제자를 길렀고 또 후대까지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잠깐, 남명이 근거하고 있는 성리학에 대해 대략 살펴보고 넘어가자. 성리학은 조선 500년을 지배한 세계관이자 도덕이고 지금도 그 영향력이 막대하다. 성리학은 12세기 이후 동아시아 전체에 파급되었지만 특히 조선에서 굳건한 지위를 유지하고 나중에는 중세 기독교처럼 범접불가의 금과옥조가 되었다. 특히 조선이 모범으로 삼은, 성리학 기반의 명나라가 북방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 멸망하면서 성리학의 원류는 조선으로 이어졌다고 믿었다.
성리학이 추구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는 왕 자신의 도덕성과 학문을 중시하는 일종의 ‘철인정치’인데, 명 멸망 후 이 성리학적 왕도정치는 조선에서만 명맥을 잇고 있고 또 완전체라고 믿었다. 때문에 성리학적 세계관과 다른 사문난적(斯文亂賊, ‘성현의 글’을 어지럽히는 적)을 용서할 수 없었고, 동시에 다른 모든 나라는 성현의 가르침을 모르는 오랑캐이니 통상할 필요가 없어 조선은 쇄국으로 치닫게 된다. 결국 세계사에서 동떨어진 조선은 패망의 길로 가고 마는데, 이 현상은 기이하게도 현대 북한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주자성리학을 주체사상이나 김일성 수령주의로 대치하면 모든 것이 판박이다. 배타적 근본주의에서 유사하기 때문이다.
기념관을 들어서면 바로 마주치는 '신명사도'. 성벽 안은 내면을 상징하며, 중심에 경이 있다. 오른쪽과 왼쪽 글귀는 '스스로를 밝히는 것은 경, 바깥으로 결단하는 것은 의'라는 뜻
남명의 학맥도. 숱한 제자를 길러낸 그의 학맥은 20세기 중반까지 유력 학자들에게 이어질 정도로 영향력이 엄청나다
성리학은 공자에서 시작된 유학을 계승하지만 내용은 좀 다르다. 원시 유학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극기복례(克己復禮)’ - ‘자아(이기심과 욕망)를 극복해 예를 회복한다’는 것으로 일종의 도덕론이자 윤리학이다. 일반 종교에서 반드시 다루는 삶과 우주, 존재의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은 없었는데 공자 스스로도 경험세계를 초월하는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괴력난신은 신기한 것, 초인적인 능력, 반란, 귀신 등 초월적인 현상이나 전통을 거스르는 것을 뜻한다. 이제 막 문명이 싹트고 자리 잡는 기원전 6세기, 춘추전국의 대혼란기에 국가간, 개인간 갈등 해소를 위해 ‘예’를 바탕으로 한 윤리의 정립은 무엇보다 시급했을 것이다.
하지만 심오한 형이상학 체계를 가진 불교와 현상 초월적인 도교가 확산되면서 유학은 여기에 대항할 형이상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11세기 북송의 정이(程頤)가 <주역>을 바탕으로 세상을 이(理)와 기(氣)의 작용으로 해석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창안한다. 거칠게 보아, 이(理)가 원리 혹은 이치라면 기(氣)는 감각이나 그 대상인 물질이다. 이는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유사한데, 이(理)를 만물의 원형인 이데아(idea)에 비유할 수 있다. ‘빨갛고 둥글고 달콤한 과일’이라는 특징을 가진 ‘사과’라는 이데아가 별도로 있고, 개별 사과는 이 이데아의 발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형형한 눈빛과 단아한 자세에서 한치의 틈도 허락지 않는 남명의 강직함을 엿볼 수 있다
남송의 주희(朱熹, 1130~1200)는 이기이원론을 받아들여 인간과 우주만물을 설명하는 성리학을 집대성한다. 주희는 성인에게 붙이는 경칭을 더해 ‘주자(朱子)’로 존경받으면서 그가 체계화한 유학은 ‘주자성리학’으로도 불리게 된다.
성리학은 원시 유학의 도덕론을 넘어, 만물뿐 아니라 인간 정신과 도덕, 사회와 국가의 원리까지 해명한다. 일찍이 <대학(大學)>에서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8조목을 선비가 일생 동안 완수해야 할 일의 순서로 내세웠다. 이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의 방법론으로 제시한 12연기와 흡사한데, 12연기는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순이다. 이를 역순으로 보면, 괴로움의 원천인 늙어 죽음은 태어나기(生) 때문이고, 태어난 것은 존재하기 때문이며, 존재는 취해서이며… 이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무명이 최초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무명을 타파하면 종국에는 늙고 죽는 문제까지 해결된다는 것이다.
남명이 기거하며 제자를 양성한 산천재.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작은 규모다. 주련에는 이곳을 택한 이유를 시로 읊은 내용이 걸려 있다
12연기가 개인적 구도 차원이라면, 대학의 8조목은 사회적이다. 천하가 태평하려면 나라가 잘 다스려져야 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집안을 잘 관리해야 하며… 가장 먼저 ‘사물의 이치를 알아야(格物)’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논리다.
결국 격물치지(格物致知)는 최초의 실천론이자 목표가 된다. 이 격물치지의 해석이 성리학의 발단이 된다. <대학>에서 말한 원래의 격물은 ‘격(格)’ 의미 그대로 사물의 순서, 위상 등의 파악을 뜻했으나 주자는 보다 폭을 넓혀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면 앎에 이른다’고 풀이해, 인간의 본성(本性)은 이미 하늘의 이치를 품고 있다는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했다. 한편 16세기 명나라 때의 학자 왕양명은 이 ‘격’을 올바른 지식(良知)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을 어지럽히는 물욕을 없애야 한다고 풀이해 ‘심즉리(心卽理)’를 제시했다.
주자성리학과 양명학은 조선 선비들의 가치관과 언행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남명의 사상 역시 이 틀에서 보면 이해가 쉽다. 남명이 중시한 경(敬)은 격물치지에서 수신까지 내면의 성찰과 태도의 원리라면, 의(義)는 '제가 치국 평천하'에 해당하는 외면적 행동원리로 볼 수 있다. 이는 학문과 무예 모두가 중요하다는 ‘문무병중(文武竝重)’으로 실현되어 제자들의 의병 활동으로 구체화된다.
산천재 중앙에 걸려 있는, 남명 사상의 핵심 경과 의. 내면은, 경의 마음으로 엄숙하고 강직하며 깨어있는 태도를 견지하고, 외면은 의를 위해 이익과 생명까지 내버려야 한다는 행동원리를 말하고 있다
경(敬)은 내 안에 있는 순수한 정신을 찾아가는 수양 방법으로 몸가짐을 엄숙히 하고 마음을 한결같이 유지해 삿된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의(義)는 밖으로 사심 없이 의로운 언행을 추구하는 것이니 경과 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눈빛이 형형하고 곧은 자세의 남명 초상화만 봐도 신념에 어긋나면 목숨도 불사하는 강직한 선비의 모습이 상상된다. 언제나 빈 틈 없는 자세와 태도를 유지했음이 분명하다. 이런 개인수양 방식은 불교의 선(禪), 도교의 무위자연에서 영향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신명사도’에도 있듯이 남명은 경(敬)을 견지하기 위해 항상 맑게 깨어 있는 ‘성성(惺惺)’의 태도를 유지했으며, 평소에도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과 ‘경의검(敬義劍)’이라는 칼을 차고 다니며 스스로를 깨우치고 경계했다. 기념관에는 그가 패용했던 방울과 칼이 전시되어 있는데, 길이 25cm 정도 되는 단검의 서슬 퍼런 날은 정신을 번쩍 깨운다. 극단적으로 치열한 자기 각성과 경계의 노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산천재에서 바라본 천왕봉. 뭇산들을 거느리고 창공으로 솟구친 위용이 굉장하다. 남명은 이 모습을 매일 바라보며 천왕봉의 기상을 흠모했을 것이고, 학자로서의 그는 천왕봉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앞의 건물은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남명은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처사(處士)로 지냈으나 왕에게 직언하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고, 사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기념관 바로 맞은편 덕천강변에는 남명이 기거하며 제자를 양성한 산천재가 있다. 첩첩한 산줄기 너머로 하늘 높이 치솟은 천왕봉을 바라보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팔작지붕 건물로, 기둥에 붙은 주련에는 이곳을 택한 이유를 밝힌 남명의 시가 걸려 있다.
봄 산 어딘들 향기 나는 풀 없을까마는(春山底處無芳草)
다만 하늘나라 곁 천왕봉에 살기 좋아서라네(只愛天王近帝居)
빈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 살 건가(白手歸來何物食)
은하처럼 맑은 물 십리나 되니 먹고도 남겠네(銀河十里喫有餘)
(필자 역)
역시 남명은 천왕봉을 사랑하고 의식해서 이 자리를 택한 것이다. 산천재에서 보는 천왕봉이 특히 웅장하고 높은 것은 고도가 100m밖에 되지 않아 엄청난 비고의 산체를 직면하기 때문이다. 남명의 호(號)는 ‘남쪽의 어두운 처사(南冥)’라고 겸양하지만 저 천왕봉처럼 세상 위로 우뚝한 정신세계를 갈망했고 또 자부했음이 틀림없다.
천왕봉을 만나러 가는 길목에서, 500년 전 날마다 천왕봉을 보며 스스로를 가다듬고 사색했던 남명의 사상을 장황하게 짚어본 것은 그 여운에 조금이라도 가피를 입고, 그의 생각에 일말의 동감이라도 얻기 위해서다.
덕천강을 건너는 징검다리. 물이 많을 때는 상류의 천평교로 우회해야 한다. 오른쪽에 마주 보이는 산은 구곡산(961m)
남명기념관에서 맞은편 마을을 통과해 덕천강으로 내려서면 징검다리가 있다. 다소 불편하지만 자전거를 들며 끌며 징검다리를 건넌다. 물이 많고 급류가 심할 때는 1.5km 상류의 천평교를 건너 우회해야 한다.
길은 오대주산(643m)과 비룡산(555m) 사이 골짜기를 향해 경사도 10%로 가파르게 파고든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북향의 협곡에도 민가는 한참 상류까지 주저리주저리 이어진다. 마지막 민가를 지나 중태재(450m)를 넘어가면 갑자기 조망이 트이면서 주산이 거대한 덩치로 앞을 막고, 북쪽으로는 거림골 방면이 한없이 깊은데 맨 뒤에는 천왕봉에서 세석평전에 이르는 지리산 주릉이 웅자를 드러낸다. 고지에서 바라보는 산악미의 입체감과 지형적 박력이 대단하다.
59번 국도가 지나는 갈현(395m)을 지나면 이제 주산 허리로 접어든다. 주산 기슭 훌쩍 높이까지 송전탑이 지나는데 이는 산청양수발전소에서 발전한 전기를 옮기는 전력망이다. 주산 북서쪽 고운동계곡에 들어선 상부저수지와 북쪽 거림골 입구 내대천 사이에 조성된 하부저수지 간 고도차(427m)를 활용해 발전한다. 심야의 남는 전기로 하부저수지의 물을 상부로 퍼 올렸다가 낮에는 상부저수지 물을 떨어뜨려 발전하니 마치 ‘영구기관’처럼 물을 재활용하니 대단히 효율적이다.
국내는 산악지대가 많아 전국에 16곳의 양수발전소가 있는데 현장을 볼 때마다 산꼭대기에 조성한 거대 저수지와 수백m에 달하는 수직 도수관을 어떻게 뚫었는지 토목기술에 감탄한다. 소위 ‘문과 먹물’들은 정치 경제 문화계를 장악한 자신들이 세상을 설계하고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세상을 바꾸고 일상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엔지니어와 과학자다.
오대주산(643m)과 비룡산(555m) 사이 골짜기를 향해 경사도 10% 길이 가파르게 이어진다. 북향의 협곡임에도 민가는 한참 상류까지 산재한다
중태리 협곡 상류에도 돌아본 모습. 골짜기 상류까지 민가가 드문드문 있고 맨 뒤로 웅석봉(1099m)이 보인다
59번 국도가 지나는 갈현(395m). 오른쪽 임도로 들어서면 주산 기슭이 시작된다
임도는 지리산 둘레길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주산 자체가 등산지로 별로 알려져 있지 않고 찾는 이가 드문 듯 길과 숲은 원시적인 분위기가 충만하다. 깊은 숲에 ‘곰 출몰주의’ 안내문이 어색하지 않지만 가장 한심한 실책에 실소와 공포감이 동시에 인다. 일부러 방사해 놓고 조심하라니…. 산악에 들면 멧돼지와 풀린 개가 가장 두려운데 곰까지 걱정해야 하다니.
길은 계속 업힐이다. 정상 바로 북쪽 능선을 지나면서 해발 670m 코스 최고점에 이르고, 북릉을 돌아서면 그제야 천왕봉이 간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껏 이렇게 웅장한 천왕봉의 전모를 본 적이 없다. 산을 오르면 봉우리 일부만 볼 수 있지만 여기서는 바닥부터 정상까지, 수많은 지능선과 골짜기의 최종 수렴지로서 천왕봉의 위용이 실감된다. 천왕봉 상공에 표류하는 한 조각 구름이 고도감과 웅장미를 더해준다. 앞서 구례 지초봉에서도 말했지만, 산은 허리춤 높이에서 바라봐야 경사면까지 입체화되어 한층 웅장해 보인다. 주산은 천왕봉을 바라보기에 최적의 위치와 높이를 갖춘 셈이다.
원근에 따라 농담을 달리하는 겹겹의 산줄기 너머로 독수리 날갯짓 모습으로 치솟은 천왕봉은 옛사람이 ‘하늘의 왕(天王)’이라고 명명할 만하다. 남명은 천왕을 천제(天帝) 가까운 곳이라고 읊었는데, 아무리 높고 웅장해도 산에 황제의 제(帝) 자는 붙이지 못했다. 주산이 임금 주(主)를 쓴 것도 천제-천왕-임금의 순차를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원시적인 느낌마저 드는 주산 허리길. 대체로 북사면이라 해가 잘 들지 않는다
고운동계곡 상류의 무시무시한 협곡 맨 위에 자리한 산청양수발전소 상부저수지 댐이 참으로 신통스럽다. 송전선은 산청양수발전소의 전기를 옮기는 전력망이다. 오른쪽 멀리 천왕봉이 보인다
고운동계곡 방면으로 다운힐 시작이다. 시멘트 포장이 망가져 원시미가 풀풀하다. 오른쪽은 구곡산, 왼쪽 뒤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희미하다
바로 맞은편의 구곡산(961m)은 골짜기가 많다는 이름 그대로 숱하게 패인 급경사 능선과 협곡의 조화가 근육질 남성을 닮아 천왕봉을 수호하는 수문장 혹은 사천왕상처럼 험상궂다. 천왕봉은 구곡산보다 1000m나 더 높으니 가히 우주의 초입에 머리를 넣고 있는 것만 같다.
이제 다운힐 시작이다. 고운동계곡 협곡미도 굉장한데, 원시적인 풍광의 골짜기 상류에 살짝 보이는 양수발전소 상부저수지(해발 680m) 댐은 가히 비현실적이다.
배바위 기도도량부터는 고운동계곡을 따라 내내 다운힐이지만 민가가 하나둘 많아지면서 이윽고 반천리 마을을 스쳐간다. 반천리를 벗어나면 시천천을 건너 천왕봉 직하 중산리에서 내려온 20번 국도를 타고 시천면소재지로 향한다. 교통량은 다소 있으나 갓길이 넉넉하고 외공리에서는 강변 농로를 탈 수 있다. 남명을 제향하는 덕천서원을 지나면 일대에서 가장 큰 마을인 시천면소재지(덕산)이고, 남명기념관은 마을 끝에 있다.
전제왕조 시절,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음에도 왕을 꾸짖는 상소를 올리고 의기 충만한 제자들을 양성한 남명의 기상은 ‘책상붙이 탁상공론 당파’에 찌든 성리학의 문약(文弱)을 딛고 고고하다. 저 천왕봉이 남명의 기상을 키운 것을 이제 분명히 알겠다.
반천리 하산길에 뒤돌아본 주산. 임도는 산 중턱에 듬성듬성 서 있는 송전탑을 옆을 지난다
시천천 둑길을 따라 남명기념관으로 되돌아가는 길
tip
남명기념관과 산천재 입구에 무료주차장이 있으며 시천면소재지에 식당, 편의점이 모여 있다. 중태재 업힐 때는 마지막 갈림길에서 길찾기에 주의한다(U턴식 우회전).
산청 주산 일주 30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