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의 고승, 영취산에서 나다
사명대사 생가지 근처에 있는 영산정사 와불상. 길이 82m, 높이 21m로 와불상으로는 세계최대다. 오른쪽 진입 계단을 보면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아직 미완이라 가까이 접근할 수는 없다
대사는 이곳에서 나셨구나. 과연 산수가 범상치 않다. 뒷산은 웅장한 영취산(739m)이고 주봉에서 흘러내린 능선이 포근히 에워싼 골짜기에서 산줄기 하나가 집 뒤로 흘러내려 청량한 터를 만들고 있다. 유력한 선대(先代)가 애써 점지한 택지가 분명하다. 이곳은 임진왜란 구국의 영웅이자 고승으로 추앙 받는 사명대사(四溟大師, 1544~1610)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 터다. 지금도 외지고 깊은 산골인데 당시는 얼마나 오지였을까.
전국의 유명한 산은 산사에 살던 승려가 이름을 붙여 불교풍이 압도적인데, 영취산(靈鷲山)은 특히 대표적이다. 독수리를 뜻하는 취(鷲)는 ‘축’으로도 발음해 전국에 영취산과 영축산이 여럿 있다. 석가모니가 설법한 인도의 산이 독수리를 닮았다는 영취산으로 이곳에서 행한 설법을 ‘영산회상(靈山會相)’이라고 하며 숭유억불을 내세운 조선시대에도 같은 이름의 국악 연주곡이 유행했고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가장 유명한 영취산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불보사찰 양산 통도사 뒷산일 것이다. 높이도 1081m나 되고 곧추 선 암봉의 기세가 독수리를 떠올리게 한다. 창녕과 여수에도 영취산(영축산)이 있고, 여기 밀양에서는 사명대사를 낳은 산이 또 영취산이다.
무안면소재지 표충각에 모셔진 사명대사 영정. 관운장 같은 긴 수염과 장중한 표정은 고승의 경지와 동시에 무장의 위용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최대의 국난은 임진왜란(1592)이었다. 7년간의 전란으로 모든 것이 황폐화된 조선은 임란 이전 170만결에 달하던 농지가 1611년에는 54만결로 줄어들었고 인구도 100만이 감소했다. 17세기 이후 조선의 몰락은 임진왜란이 치명타였고 겨우 44년 뒤에 일어난 병자호란(1636)이 쐐기를 박아 조선은 다시는 복구하지 못하고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
누란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존속한 것은 명나라 침공을 내건 전쟁의 명분 때문에 참전이 불가피했던 명군의 도움과 이순신이 이끈 조선수군의 분투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리멸렬한 관군과 달리 전국 각지에서 거병해 유리한 지형지물을 활용한 유격전으로 왜군을 괴롭힌 의병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군사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이 조악한 무기를 들고 최신의 조총과 서슬 퍼런 장도로 무장한 왜군을 상대하는 것은 죽음을 넘어선, 숭고한 희생이었다.
의병 중에 특기할 존재가 있으니 바로 승병(僧兵)이다. 불살생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승려가 전투에 참가해 적군을 살상하는, 아주 특이한 사례다. 이는 신라 이래 자리를 잡은 호국불교의 전통으로 원광대사가 전한 ‘세속오계’에서 그 원형을 볼 수 있다. 세속오계는 유교적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전쟁에 나아가서는 ‘살생유택’이되 ‘임전무퇴’의 용기를 요구한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내내 승병을 이끌고 여러 번 왜군을 무찔렀다.
밀양은 사명대사가 나고 자랐으며 그의 사당(표충사)이 있는 곳이다. 생가를 중심으로 사명대사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국가대사가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사명대사 표충비. 1738년 사명대사의 5대 법손인 남붕조사(南鵬祖師)가 세웠다
사명대사 생가에서 6km 떨어진 무안면소재지에는 사명대사의 업적을 기록한 표충비(表忠碑)가 있다. 비석은 1742년에 건립되었으며 높이 4m, 너비 1m의 큰 규모로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땀비’로 유명하다. 비석 앞에는 땀을 흘리는 비석 사진과 시기를 정리해 놓았는데 1894년 11월 19일 동학농민운동 7일 전에 3말1되를 시작으로 1983년 11월 15일 미얀마 아웅산사건을 거쳐 2011년 11월 18일까지 30차례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무의미한 때에 땀을 흘린 시기도 적지 않다.
과학적으로는 차별냉각으로 이슬이 맺힌 것으로 보는데 비신은 검은 대리석, 받침돌과 머릿돌은 화강암이다. 비각 옆으로 작은 물길이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물길은 비각 근처에서 복개되어 금정교 옆에서 청도천으로 합류하고 있지만 일부는 비각 지하로 스며들 가능성이 높다. 원리가 짐작은 가지만 비슷한 형식의 비석이 전국에 수없이 많은데 하필 사명대사 비석만 ‘땀’을 흘리는 것은 특별한 일임에 틀림없다.
비각 앞에는 사명대사의 5대 제자 남붕선사가 표충비를 세울 때 함께 심은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수령은 300년 정도이고 키는 1.5m에 불과하지만 원줄기를 자르고 곁가지를 다듬어 우산처럼 넓게 퍼진 독특한 모습이다. 가슴높이 둘레는 1.1m이며 문화재로 지정된 향나무 20여 그루 중 이런 모양은 이곳이 유일하다(경상남도 기념물). 바로 옆 표충각에는 사명대사를 중심으로 서산대사와 영규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담장 없이 이웃한 홍제사는 표충각과 표충비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사찰이다.
표충비가 '땀을 흘리는' 모습. 글자 사이 행간으로 액체가 흘러내린다. 오른쪽에는 2011년까지 땀을 흘린 날짜를 소개하고 있다
표충비 건립 때 심었다는 향나무. 우산처럼 옆으로 넓게 퍼진 특이한 모양이다
전남 무안(務安)과 한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무안(武安) 면소재지는 상당히 크고 번화한 편이다. 들이 넓지는 않으나 청도천과 무안천을 중심으로 농경지가 길게 발달해 있고 특용작물 재배가 성행해 들과 마을에는 풍요가 흐른다. 초중고 모두 살아 있는 것만 봐도 고장의 여유를 알 만하다.
면소재지에서 무안천을 따라 서향하면 영취산 자락으로 접어든다. 도중에 함양울산고속도로의 장대한 고가고도가 들판 위를 지나며 공사중이다. 고속도로가 사통팔달한 건 좋은데 이제는 국토면적에 비해 밀도가 조금 지나친 것 아닌가 싶다. 고속도로가 뚫리면 이 조용한 골짜기도 웅웅대는 소음으로 가득 찰 것이다.
저 멀리 영취산 주릉을 배경으로 와불상 머리가 보인다. 길이가 82m나 되고 높이도 21m에 달하는, 거대한 와불상이 능선 위에 누워있다. 영산정사에서 조성한 불상으로 와불로는 세계최대 크기여서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었다고 한다. 아직 미완이어서 가까이 갈 수는 없으나 워낙 거대해 멀리서 봐도 충분하다. 황금색으로 칠한 와불은 산줄기와 맞먹을 정도로 크지만 완성도는 떨어진다. 시멘트로 제작해 표면이 거칠고 신체 비례도 다소 어색하다. 무엇보다 즐거운 듯 미소 지은 표정은 와불상에 어울리지 않는다. 와불상은 석가모니가 누워서 열반할 당시의 모습을 형상화해 엄숙한 분위기여야 할텐데… 어쩌면 고정관념의 허를 찌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라보는 사람도 슬쩍 미소가 지어지기는 한다. 불상은 7층 목탑이 있는 영산정사와 영취산 정상을 일직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영산정사는 사명대사가 의병 훈련장으로 사용했던 옛 삼적사 터에 1997년 세워져 고졸한 맛은 없다. 석가모니 진신사리와 2천여기의 각종 불상, 나뭇잎에 쓴 패엽경 등을 보관한 7층 목탑 형태의 성보박물관이 특징이다.
공사중인 함양울산고속도로(밀양-창녕 간은 24년, 창녕-함양 간은 26년 완공 예정). 근래의 고속도로는 외곽 산간지대를 통과해 터널과 고가도로가 특히 많다
영취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 위에 와불상의 머리가 보오기 시작한다. 와불상의 시선은 영산정사와 영취산 정상이다
7층 목탑 형태의 성보박물관이 볼만한 영산정사. 탑 오른쪽 봉우리가 영취산 정상이다영산정사 흰코키리상 사이로 바라본 와불상
영산정사와 산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명대사 생가가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복원되어 있는데 위치와 부지를 봐도 유력 양반가임을 알 수 있다. 아버지 임수성(任守城)은 형조판서로 추증될 정도로 풍천임씨(豐川任氏) 명문가였다. 사명대사는 15세에 어머니를, 16세에는 아버지를 여의자 세속을 떠나 불도를 닦기로 결심하고 김천 직지사로 출가했다. 18세에 승과(僧科)에 합격하고 30세쯤에는 자신이 출가한 직지사 주지가 되었으니 일찍부터 승단 내외의 신망이 대단했다. 32세 때는 선종의 종찰인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서산(西山) 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진 1592년, 49세의 사명대사는 금강산 유점사에 머물고 있었다. 왜군이 들이닥치자 왜장과의 필담으로 설복시켜 영동의 아홉 고을이 참화를 면했다. 고향 밀양으로 내려간 대사는 재약사(현 표충사)에서 의병을 일으켜 스승인 서산대사와 합류했다. 서산대사는 선조로부터 ‘팔도선교도총섭’으로 임명받아 전국의 승병조직을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연로했던 서산대사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통솔하도록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이후 사명대사는 실질적인 승병 대장이 되어 평양성 탈환전을 비롯해 많은 전투에 참전,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사명대사 생가지. 영취산 자락이 흘러내리는, 남향의 밝은 터에 자리잡고 있다
생가지 옆에 조성된 사명대사유적지 공원. 뒤쪽 건물은 사명대사기념관이다. 코스는 뒤쪽 산허리를 돌아 오른쪽 마곡고개를 너어간다
어린 시절, TV에서 사명대사 주인공의 인형극을 본 기억이 있다. 지금도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장면은, 대사가 일본으로 건너가 온갖 위협과 회유를 물리치고 도력을 발휘해 동포를 구해서 돌아오는 장면이다. 실제로 사명대사는 전쟁이 끝난 5년 뒤인 1604년 62세의 노령에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화친을 맺고 끌려간 동포 3천여 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당시 많은 일본인이 대사의 풍모와 법력에 감화했다고 한다. 초상화에도 남아 있듯이 대사는 마치 관운장처럼 긴 수염을 길렀고 체격도 커서 위엄이 대단했다고 한다.
이후 대사는 치악산을 거쳐 해인사로 들어가 67세에 입적했다. 입적할 당시 대사는 마지막 설법을 하고 가부좌한 상태로 태연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근래의 고승 중에도 가부좌 상태로 입적한 경우가 있는데, 이는 불가사의다. 생명이 다하는 순간 아무런 고통도 없이 앉은 상태로 편안히 최후를 맞는다… 인생 최고, 최후의 공포이자 단절을 이렇게 편안하게 맞는 것만으로도 고승의 특별한 경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가지 안쪽 계곡은 사명대사유적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동상과 기념관 외에 다양한 조형물을 갖춘, 상당히 큰 규모지만 워낙 외진 곳이라 찾는 이는 많지 않다. 일대는 어린 시절의 대사가 뛰놀던 놀이터였을 것이다.
마곡고개 업힐은 내내 숲길이다
고갯길에서 내려다본 영취산 동쪽 방면. 첩첩한 산줄기 사이로 비닐하우스 들판이 살짝 보인다마곡고개를 넘어 다운힐하면 만나는 첫마을 무시듬골. 해가 잠깐 드는 깊은 산골이다
유적지공원을 지나 협곡 안으로 진입하면 마지막 마곡마을을 지나 산으로 접어들면서 급경사 오르막이 막아선다. 순식간에 고도를 높인 길은 영취산 동쪽 기슭을 파고들어 해발 440m 능선을 넘어간다. 고개이름이 없어 가장 가까운 마을을 따서 ‘마곡고개’로 칭하기로 한다. 여름 녹음에 숲까지 짙지만 간혹 조망이 트여 산 아래 풍경과 먼 산을 보여준다.
고개를 넘어서도 길은 계속 고도를 높여가는데 해발 510m의 두 번째 고개는 삼거리를 이룬다. 왼쪽 길은 창녕 화왕산과 관룡산 사이 옥천계곡으로 내려간다. 길은 해발 530m까지 올라갔다가 마침내 다운힐이 시작된다. 잠시 트인 동쪽 저편으로 화악산(932m)이 웅장하고 그 남쪽으로는 22년 5월 큰 산불이 나 민둥산이 된 옥교산(538m)이 보인다.
골짜기 최상류에도 작은 마을이 있다. 아침해가 늦게 뜨고 얼마 있지 않아 서산에 해가 걸리는 산골을 자발적으로 택한 사람들이다.
다운힐은 조천저수지를 지나 들판지대가 시작되는 조천마을 이후에도 계속된다. 왼쪽으로 열왕산(663m)이 우뚝하고 길은 점점 평탄해지더니 이윽고 청도면소재지에 이른다. 밀양의 북서단에 자리한 산골이라 면소재지는 무안의 20% 정도로 작다. 마을 옆을 지나는 24번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천왕재를 넘으면 창녕이나 달성으로 이어진다. 산세가 웅장하긴 해도 600m급에 불과한데 열왕산, 천왕산(619m) 등등 이름이 거창하다.
청도천 둑길을 따라 하류로 꾸준히 남하한다. 청도면에서 무안면까지는 12km 정도로 멀지만 완만하나마 하류로 향하는 내리막이라 페달링이 가볍고 풍경도 쾌적하다. 어느새 성큼 짧아진 여름해가 서산 위를 서성이고 있다.
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천저수지. 해발 200m로 꽤 높은 고지대다. 이제부터 아스팔트 길이 시작된다밀양 북서단의 청도면소재지는 무안면소재지보다 훨씬 작다. 왼쪽 뒤로 천왕산(619m)이 철탑을 이고 있다아파트와 교회 첨탑이 보이는 무안면소재지 외곽 청도천 둑에는 자전거길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tip
표충비각 맞은편에 무료 주차장이 있으며, 표충비각 일대는 무료입장이다. 영산정사 와불상은 미완성으로 멀리서만 볼 수 있다. 사명대사 생가지와 유적지도 무료입장이다. 무안면소재지에 식당과 편의점이 다수 있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밀양 사명대사길 38km
구국의 고승, 영취산에서 나다
사명대사 생가지 근처에 있는 영산정사 와불상. 길이 82m, 높이 21m로 와불상으로는 세계최대다. 오른쪽 진입 계단을 보면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아직 미완이라 가까이 접근할 수는 없다
대사는 이곳에서 나셨구나. 과연 산수가 범상치 않다. 뒷산은 웅장한 영취산(739m)이고 주봉에서 흘러내린 능선이 포근히 에워싼 골짜기에서 산줄기 하나가 집 뒤로 흘러내려 청량한 터를 만들고 있다. 유력한 선대(先代)가 애써 점지한 택지가 분명하다. 이곳은 임진왜란 구국의 영웅이자 고승으로 추앙 받는 사명대사(四溟大師, 1544~1610)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 터다. 지금도 외지고 깊은 산골인데 당시는 얼마나 오지였을까.
전국의 유명한 산은 산사에 살던 승려가 이름을 붙여 불교풍이 압도적인데, 영취산(靈鷲山)은 특히 대표적이다. 독수리를 뜻하는 취(鷲)는 ‘축’으로도 발음해 전국에 영취산과 영축산이 여럿 있다. 석가모니가 설법한 인도의 산이 독수리를 닮았다는 영취산으로 이곳에서 행한 설법을 ‘영산회상(靈山會相)’이라고 하며 숭유억불을 내세운 조선시대에도 같은 이름의 국악 연주곡이 유행했고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가장 유명한 영취산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불보사찰 양산 통도사 뒷산일 것이다. 높이도 1081m나 되고 곧추 선 암봉의 기세가 독수리를 떠올리게 한다. 창녕과 여수에도 영취산(영축산)이 있고, 여기 밀양에서는 사명대사를 낳은 산이 또 영취산이다.
무안면소재지 표충각에 모셔진 사명대사 영정. 관운장 같은 긴 수염과 장중한 표정은 고승의 경지와 동시에 무장의 위용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최대의 국난은 임진왜란(1592)이었다. 7년간의 전란으로 모든 것이 황폐화된 조선은 임란 이전 170만결에 달하던 농지가 1611년에는 54만결로 줄어들었고 인구도 100만이 감소했다. 17세기 이후 조선의 몰락은 임진왜란이 치명타였고 겨우 44년 뒤에 일어난 병자호란(1636)이 쐐기를 박아 조선은 다시는 복구하지 못하고 멸망으로 치닫게 된다.
누란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존속한 것은 명나라 침공을 내건 전쟁의 명분 때문에 참전이 불가피했던 명군의 도움과 이순신이 이끈 조선수군의 분투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리멸렬한 관군과 달리 전국 각지에서 거병해 유리한 지형지물을 활용한 유격전으로 왜군을 괴롭힌 의병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군사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이 조악한 무기를 들고 최신의 조총과 서슬 퍼런 장도로 무장한 왜군을 상대하는 것은 죽음을 넘어선, 숭고한 희생이었다.
의병 중에 특기할 존재가 있으니 바로 승병(僧兵)이다. 불살생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승려가 전투에 참가해 적군을 살상하는, 아주 특이한 사례다. 이는 신라 이래 자리를 잡은 호국불교의 전통으로 원광대사가 전한 ‘세속오계’에서 그 원형을 볼 수 있다. 세속오계는 유교적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전쟁에 나아가서는 ‘살생유택’이되 ‘임전무퇴’의 용기를 요구한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내내 승병을 이끌고 여러 번 왜군을 무찔렀다.
밀양은 사명대사가 나고 자랐으며 그의 사당(표충사)이 있는 곳이다. 생가를 중심으로 사명대사의 흔적을 따라가 본다.
국가대사가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사명대사 표충비. 1738년 사명대사의 5대 법손인 남붕조사(南鵬祖師)가 세웠다
사명대사 생가에서 6km 떨어진 무안면소재지에는 사명대사의 업적을 기록한 표충비(表忠碑)가 있다. 비석은 1742년에 건립되었으며 높이 4m, 너비 1m의 큰 규모로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땀비’로 유명하다. 비석 앞에는 땀을 흘리는 비석 사진과 시기를 정리해 놓았는데 1894년 11월 19일 동학농민운동 7일 전에 3말1되를 시작으로 1983년 11월 15일 미얀마 아웅산사건을 거쳐 2011년 11월 18일까지 30차례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무의미한 때에 땀을 흘린 시기도 적지 않다.
과학적으로는 차별냉각으로 이슬이 맺힌 것으로 보는데 비신은 검은 대리석, 받침돌과 머릿돌은 화강암이다. 비각 옆으로 작은 물길이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물길은 비각 근처에서 복개되어 금정교 옆에서 청도천으로 합류하고 있지만 일부는 비각 지하로 스며들 가능성이 높다. 원리가 짐작은 가지만 비슷한 형식의 비석이 전국에 수없이 많은데 하필 사명대사 비석만 ‘땀’을 흘리는 것은 특별한 일임에 틀림없다.
비각 앞에는 사명대사의 5대 제자 남붕선사가 표충비를 세울 때 함께 심은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수령은 300년 정도이고 키는 1.5m에 불과하지만 원줄기를 자르고 곁가지를 다듬어 우산처럼 넓게 퍼진 독특한 모습이다. 가슴높이 둘레는 1.1m이며 문화재로 지정된 향나무 20여 그루 중 이런 모양은 이곳이 유일하다(경상남도 기념물). 바로 옆 표충각에는 사명대사를 중심으로 서산대사와 영규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담장 없이 이웃한 홍제사는 표충각과 표충비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사찰이다.
표충비가 '땀을 흘리는' 모습. 글자 사이 행간으로 액체가 흘러내린다. 오른쪽에는 2011년까지 땀을 흘린 날짜를 소개하고 있다
표충비 건립 때 심었다는 향나무. 우산처럼 옆으로 넓게 퍼진 특이한 모양이다
전남 무안(務安)과 한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무안(武安) 면소재지는 상당히 크고 번화한 편이다. 들이 넓지는 않으나 청도천과 무안천을 중심으로 농경지가 길게 발달해 있고 특용작물 재배가 성행해 들과 마을에는 풍요가 흐른다. 초중고 모두 살아 있는 것만 봐도 고장의 여유를 알 만하다.
면소재지에서 무안천을 따라 서향하면 영취산 자락으로 접어든다. 도중에 함양울산고속도로의 장대한 고가고도가 들판 위를 지나며 공사중이다. 고속도로가 사통팔달한 건 좋은데 이제는 국토면적에 비해 밀도가 조금 지나친 것 아닌가 싶다. 고속도로가 뚫리면 이 조용한 골짜기도 웅웅대는 소음으로 가득 찰 것이다.
저 멀리 영취산 주릉을 배경으로 와불상 머리가 보인다. 길이가 82m나 되고 높이도 21m에 달하는, 거대한 와불상이 능선 위에 누워있다. 영산정사에서 조성한 불상으로 와불로는 세계최대 크기여서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었다고 한다. 아직 미완이어서 가까이 갈 수는 없으나 워낙 거대해 멀리서 봐도 충분하다. 황금색으로 칠한 와불은 산줄기와 맞먹을 정도로 크지만 완성도는 떨어진다. 시멘트로 제작해 표면이 거칠고 신체 비례도 다소 어색하다. 무엇보다 즐거운 듯 미소 지은 표정은 와불상에 어울리지 않는다. 와불상은 석가모니가 누워서 열반할 당시의 모습을 형상화해 엄숙한 분위기여야 할텐데… 어쩌면 고정관념의 허를 찌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라보는 사람도 슬쩍 미소가 지어지기는 한다. 불상은 7층 목탑이 있는 영산정사와 영취산 정상을 일직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영산정사는 사명대사가 의병 훈련장으로 사용했던 옛 삼적사 터에 1997년 세워져 고졸한 맛은 없다. 석가모니 진신사리와 2천여기의 각종 불상, 나뭇잎에 쓴 패엽경 등을 보관한 7층 목탑 형태의 성보박물관이 특징이다.
공사중인 함양울산고속도로(밀양-창녕 간은 24년, 창녕-함양 간은 26년 완공 예정). 근래의 고속도로는 외곽 산간지대를 통과해 터널과 고가도로가 특히 많다
영취산에서 흘러내린 산줄기 위에 와불상의 머리가 보오기 시작한다. 와불상의 시선은 영산정사와 영취산 정상이다
7층 목탑 형태의 성보박물관이 볼만한 영산정사. 탑 오른쪽 봉우리가 영취산 정상이다영산정사 흰코키리상 사이로 바라본 와불상
영산정사와 산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명대사 생가가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복원되어 있는데 위치와 부지를 봐도 유력 양반가임을 알 수 있다. 아버지 임수성(任守城)은 형조판서로 추증될 정도로 풍천임씨(豐川任氏) 명문가였다. 사명대사는 15세에 어머니를, 16세에는 아버지를 여의자 세속을 떠나 불도를 닦기로 결심하고 김천 직지사로 출가했다. 18세에 승과(僧科)에 합격하고 30세쯤에는 자신이 출가한 직지사 주지가 되었으니 일찍부터 승단 내외의 신망이 대단했다. 32세 때는 선종의 종찰인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서산(西山) 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진 1592년, 49세의 사명대사는 금강산 유점사에 머물고 있었다. 왜군이 들이닥치자 왜장과의 필담으로 설복시켜 영동의 아홉 고을이 참화를 면했다. 고향 밀양으로 내려간 대사는 재약사(현 표충사)에서 의병을 일으켜 스승인 서산대사와 합류했다. 서산대사는 선조로부터 ‘팔도선교도총섭’으로 임명받아 전국의 승병조직을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연로했던 서산대사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통솔하도록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이후 사명대사는 실질적인 승병 대장이 되어 평양성 탈환전을 비롯해 많은 전투에 참전,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사명대사 생가지. 영취산 자락이 흘러내리는, 남향의 밝은 터에 자리잡고 있다
생가지 옆에 조성된 사명대사유적지 공원. 뒤쪽 건물은 사명대사기념관이다. 코스는 뒤쪽 산허리를 돌아 오른쪽 마곡고개를 너어간다
어린 시절, TV에서 사명대사 주인공의 인형극을 본 기억이 있다. 지금도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장면은, 대사가 일본으로 건너가 온갖 위협과 회유를 물리치고 도력을 발휘해 동포를 구해서 돌아오는 장면이다. 실제로 사명대사는 전쟁이 끝난 5년 뒤인 1604년 62세의 노령에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화친을 맺고 끌려간 동포 3천여 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당시 많은 일본인이 대사의 풍모와 법력에 감화했다고 한다. 초상화에도 남아 있듯이 대사는 마치 관운장처럼 긴 수염을 길렀고 체격도 커서 위엄이 대단했다고 한다.
이후 대사는 치악산을 거쳐 해인사로 들어가 67세에 입적했다. 입적할 당시 대사는 마지막 설법을 하고 가부좌한 상태로 태연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근래의 고승 중에도 가부좌 상태로 입적한 경우가 있는데, 이는 불가사의다. 생명이 다하는 순간 아무런 고통도 없이 앉은 상태로 편안히 최후를 맞는다… 인생 최고, 최후의 공포이자 단절을 이렇게 편안하게 맞는 것만으로도 고승의 특별한 경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가지 안쪽 계곡은 사명대사유적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동상과 기념관 외에 다양한 조형물을 갖춘, 상당히 큰 규모지만 워낙 외진 곳이라 찾는 이는 많지 않다. 일대는 어린 시절의 대사가 뛰놀던 놀이터였을 것이다.
마곡고개 업힐은 내내 숲길이다
고갯길에서 내려다본 영취산 동쪽 방면. 첩첩한 산줄기 사이로 비닐하우스 들판이 살짝 보인다마곡고개를 넘어 다운힐하면 만나는 첫마을 무시듬골. 해가 잠깐 드는 깊은 산골이다
유적지공원을 지나 협곡 안으로 진입하면 마지막 마곡마을을 지나 산으로 접어들면서 급경사 오르막이 막아선다. 순식간에 고도를 높인 길은 영취산 동쪽 기슭을 파고들어 해발 440m 능선을 넘어간다. 고개이름이 없어 가장 가까운 마을을 따서 ‘마곡고개’로 칭하기로 한다. 여름 녹음에 숲까지 짙지만 간혹 조망이 트여 산 아래 풍경과 먼 산을 보여준다.
고개를 넘어서도 길은 계속 고도를 높여가는데 해발 510m의 두 번째 고개는 삼거리를 이룬다. 왼쪽 길은 창녕 화왕산과 관룡산 사이 옥천계곡으로 내려간다. 길은 해발 530m까지 올라갔다가 마침내 다운힐이 시작된다. 잠시 트인 동쪽 저편으로 화악산(932m)이 웅장하고 그 남쪽으로는 22년 5월 큰 산불이 나 민둥산이 된 옥교산(538m)이 보인다.
골짜기 최상류에도 작은 마을이 있다. 아침해가 늦게 뜨고 얼마 있지 않아 서산에 해가 걸리는 산골을 자발적으로 택한 사람들이다.
다운힐은 조천저수지를 지나 들판지대가 시작되는 조천마을 이후에도 계속된다. 왼쪽으로 열왕산(663m)이 우뚝하고 길은 점점 평탄해지더니 이윽고 청도면소재지에 이른다. 밀양의 북서단에 자리한 산골이라 면소재지는 무안의 20% 정도로 작다. 마을 옆을 지나는 24번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천왕재를 넘으면 창녕이나 달성으로 이어진다. 산세가 웅장하긴 해도 600m급에 불과한데 열왕산, 천왕산(619m) 등등 이름이 거창하다.
청도천 둑길을 따라 하류로 꾸준히 남하한다. 청도면에서 무안면까지는 12km 정도로 멀지만 완만하나마 하류로 향하는 내리막이라 페달링이 가볍고 풍경도 쾌적하다. 어느새 성큼 짧아진 여름해가 서산 위를 서성이고 있다.
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천저수지. 해발 200m로 꽤 높은 고지대다. 이제부터 아스팔트 길이 시작된다밀양 북서단의 청도면소재지는 무안면소재지보다 훨씬 작다. 왼쪽 뒤로 천왕산(619m)이 철탑을 이고 있다아파트와 교회 첨탑이 보이는 무안면소재지 외곽 청도천 둑에는 자전거길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tip
표충비각 맞은편에 무료 주차장이 있으며, 표충비각 일대는 무료입장이다. 영산정사 와불상은 미완성으로 멀리서만 볼 수 있다. 사명대사 생가지와 유적지도 무료입장이다. 무안면소재지에 식당과 편의점이 다수 있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밀양 사명대사길 38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