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권울주 치술령

자생투어
202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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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 부인은 왜, 여기서 망부석이 되었나

 

치술부인과 두 딸의 영혼이 새가 되어 날아 들었다는 은을암 가는 길. 경사가 극심하다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잡혀있던 두 왕자를 구해내고 자신은 죽은, 신라의 박제상(朴堤上, 363~419)은 ‘만고충신’으로 떠받들어 졌으나 남겨진 가족은 기다림과 불안에 떨어야 했다. 박제상은 정사인 <삼국사기>는 물론 <삼국유사>와 <일본서기>에도 기록되어 있는 실존 인물로 사건 역시 실재했다.

<삼국사기>에는 박제상으로 나오지만 <삼국유사>에는 김제상으로 등장하며, 눌지왕의 명으로 고구려와 왜를 차례로 방문해 볼모로 있던 눌지왕의 동생 복호와 미사흔을 구해냈다. 하지만 왜국에서 미사흔을 먼저 보낸 후 붙잡히고 말았다. 왜왕은 자신의 신하가 되라고 회유했지만 박제상은 "신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가 되지는 않겠다"고 저항하다 잔혹하게 처형당하고 만다. 그가 화형을 당한 장소는 대마도에 전설처럼 전해온다. 아무리 왕명이라고 해도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이자 파사왕의 5세손 왕족인 그가 목숨을 바쳐 왕자를 구출해온 이유는 무엇일까.

박제상과 치술부인, 두 딸을 모시고 있는 치산서원. 치술령 서쪽에 있다  

치산서원에 모셔진 박제상 영정

실성왕(재위 402~417)은 내물왕의 조카로, 내물왕이 죽자 태자 눌지가 너무 어려 대신 왕위에 올랐다. 실성왕은 등극하자말자 침략이 잦았던 왜를 위무하기 위해 수교를 맺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 눌지의 동생)을 왜에 볼모로 보냈고, 412년에는 내물왕의 또 다른 아들 복호(卜好)마저 고구려로 인질을 보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는데, 내물왕 시절 실성왕은 9년 간이나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어서 그 복수로 내물왕의 두 아들을 고구려와 왜로 보냈던 것이다. 실성왕은 고구려군 마중을 나간 눌지마저 고구려인을 시켜 죽이려고 했다가 반대로 고구려군과 합세한 눌지의 반격으로 시해당하고 만다.

왕이 된 눌지는 가장 먼저 고구려와 왜에 인질로 가 있는 동생들을 구출하고 싶었다. 중신들이 적당한 인물로 양산지역(삽량주)의 간(干)으로 있던 박제상을 천거했다고 하지만, 박제상은 실성왕의 딸인 치술(鵄述)의 남편이어서 실성왕에 대한 눌지왕의 복수심이 그를 선택하게 한 것 아닌가 싶다. 눌지왕은 치술의 언니인 아로부인을 왕비로 둬서 박제상과는 동서지간이 되는데, 장인(실성왕)을 살해할 정도이니 정략결혼으로 봐야할 것이다. 이렇게 박제상의 불행 이면에는 몇 대에 걸친 왕실 내부의 원한관계가 얽혀 있었다.

치술부인과 두 딸 아기와 아경의 삼모녀상. 치산서원 옆 박제상기념관에 있다

치술령 정상에 세워진 신모사지 기념비. 오른쪽 뒤 나무 계단으로 내려가면 망부석이 있다   

박제상과 부인, 두 딸을 제향하는 치산서원이 울주 치술령(765m) 아래에 자리한 데는 슬픈 전설이 어려 있다. 박제상이 왜국으로 떠난 후 치술부인은 세 딸을 데리고 이 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통곡하다 숨져, 치술부인과 두 딸은 망부석이 되었고 세 모녀의 혼령은 새가 되어 남쪽 국수봉의 은을암 동굴로 들어갔다고 한다. 살아남은 둘째 딸 아영(阿榮)은 왜국에서 돌아온 미사흔의 부인이 되었다. 막내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가 거문고의 명수로 알려진 백결선생이라는 설이 있다. 이후 치술령 정상에 치술부인을 기리는 신모사(神母祠)가 세워졌고 지금도 신모사 기념비가 서 있다. 치(鵄)는 솔개를, 술(述)은 수리, 즉 높은 산을 의미해 치술령은 ‘새가 사는 높은 고개(산)’의 뜻이 된다.

치산서원에는 박제상을 모시는 충렬묘(忠烈廟), 치술부인(金校金氏)을 모신 신모사(神母祠), 두 딸 아기(阿奇)와 아경(阿慶)을 모신 쌍정려(雙旌閭)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위패와 함께 영정이 걸려 있으며 바로 옆 기념관에는 박제상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제상을 ‘박씨 재상(宰相)’으로 오인하기 쉬운데 제상(堤上)은 이름이다.

치술령 정상 아래의 망부석. 오른쪽 바위면에 '望夫石' 글씨가 보인다. 치술부인과 두 딸이 진짜 돌이 된 것이 아니라 이곳쯤에서 박제상을 그리며 동해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치산서원에 모셔진 치술부인(김씨부인) 영정. 상상화이겠지만 현실적 생동감이 느껴진다

치술령에서 치술부인과 함께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숨진 아기와 아경 초상화  

망부석 위에서 바라본 울산 시가지와 동해 

이제 박제상과 치술부인 그리고 두 딸의 슬픈 전설을 따라 치술령 여기저기를 오른다. 치술부인이 이곳으로 와서 동해를 바라본 것은 박제상이 이 일대를 통괄하는 삽량주(歃良州)를 다스려 익히 알고 있는 장소였기 때문일 것이다. 인근에 있는 천전리각석과 반구대암각화에 남은 글씨를 보면 신라 귀족이나 화랑이 이 일대로 자주 유람을 오기도 했는데 경주에서 가까운 입지도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박제상유적지가 자리한 일대는 치술령과 국수봉(603m), 연화산(532m)으로 둘러싸인 지름 3km 정도의 분지다. 내부에 작은 구릉이 있기는 하나 마치 분화구처럼 완벽한 지형은 양구 펀치볼이나 합천 초계분지를 닮았다. 운석충돌구는 아닌 듯하고 펀치볼처럼 침식분지로 추정된다. 물이 빠져나가는 북서쪽 구미리의 수구(水口)는 좁은 협곡으로 이곳을 중심으로 분지 전체가 일종의 선상지처럼 완만한 경사면을 이루는 특이한 지형이다. 이름이 따로 없어 지명을 따 ‘두동분지’라고 부르기로 한다.

연화산에서 바라본 '두동분지'. 정면 봉우리가 치술령, 오른쪽은 은을암이 있는 국수봉이다. 두 산자락을 따라 다랑논이 길게 형성되어 있다  

박제상유적지에서 치술령 중턱 법왕사를 향해 오른다. 해발 400m, 훌쩍 높은 곳에 자리한 절은 고찰은 아니며 치술령 전설과도 관련이 없는 듯하다. 절 뒤편에 모셔놓은, 팔이 33개인 33관음상과 옆에 도열한 33기 관음상이 특별하다. 치술령은 법왕사에서 50분 정도 걸어 올라야 한다. 왕복 2시간을 잡아야 하니 별도의 등산으로 가는 것이 좋고, 여기에 실은 사진은 예전에 필자가 올라가서 찍은 것이다. 정상에는 신모사 기념비와 망부석이 있으며, 망부석에서는 울산 방면으로 동해가 훤히 보인다.

법왕사에서 150m 내려가면 왼쪽으로 국수봉 방면 임도가 나 있다. 기이한 침식분지를 바라보며 고도를 높여가면 길은 능선 위까지 올라갔다가 서낭재(325m)로 내려선다. 분지와 범서면을 연결하는 고갯길로 옛날에는 서낭당이 있었던 듯 하며, 정자(서낭정)도 서 있다.

치술령 중턱 해발 400m에 자리한 법왕사. 아래로 두동분지가 펼쳐지고 탑 뒤로 연화산이 보인다  법왕사 33관음상. 조각기법이 뛰어나서 인상에 남는다

치술령 임도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풍광. 가장 멀리 보이는 고봉은 고헌산(1034m)두동분지와 연화산이 정면으로 내려다보인다

서낭재 직전에서 바라본 국수봉. 정상 왼쪽 아래 가파른 사면에 은을암이 있다. 월성원자력발전소가 멀지 않아 치술령과 국수봉 일대에는 송전탑이 많다  

서낭재에서 왼쪽 범서 방면으로 다운힐 한다. 울산시내가 멀지 않은데 첩첩산중 분위기가 물씬하다. 다운힐의 쾌감은 잠시, 220m까지 내려가는 바람에 400m 높이의 은을암까지 급한 업힐을 되올라야 한다. 은을암(隱乙庵)은 이름 그대로 새가 숨은 곳, 치술부인과 두 딸의 영혼이 새가 되어 날아들었다는 곳이다.

가히, 새가 아니면 엄두를 낼 수 없는 국수봉 북사면 비탈면에 암자가 위태롭게 걸려 있다. 마당을 조성하려고 급사면에 가구(架構)를 만들고 대나무로 장식했는데 암자 입구는 가구 아래를 통과해서 진입한다. 암자를 지을 때 대단한 노역이 들어갔을 것이다.

극락전 옆에 있는 수직 바위 틈새 굴이 새가 숨어든 은을암(隱乙巖)이고 암자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은을암 자리에서는 치술령 정상이 마주 보이고, 북동쪽으로는 토함산 남쪽 삼태봉(630m)의 풍력발전기가 아득하다. 이 산줄기 때문에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왜 치술부인의 영혼이 새가 되어 이곳으로 숨어들었을까 궁금했는데 현장에 와보고 바로 이해했다. 치술령에서 바라볼 때 이곳이 가장 깊고 험한 곳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어쩌면 주민들이 숨진 모녀를 발견했을 때 마침 새 세 마리가 국수봉 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목격한 것이 전설의 시원인지도 모른다.

치술령과 국수봉 사이 안부인 서낭재에는 서낭정이 서 있다  

은을암 업힐 도중 바라본 동쪽 조망. 발 아래 골짜기는 범서읍 일원으로 심심산골 분위기다. 맨 뒤 산줄기는 삼태봉~파군산~동대산으로 이어지는 울산 동부의 산줄기다. 저 너머에 동해가 있다

급사면에 터잡은 은을암. 앞마당이 구조물 위 허공에 있다 

위태로운 절벽에 자리한 은을암. 왼쪽 극락전 뒤 바위가 세 모녀의 영혼이 화한 새가 숨어들었다는 은을암(隱乙巖)이다  

작은 전각 안에 있는 굴이 새가 된 세 모녀의 영혼이 들어갔다는 곳이다

굴은 꽤 깊이가 있어 보이고, 맑은 약수가 흘러내린다

극락전 벽에는 새가 되어 은을암으로 날아드는 치술부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은을암에서 왼쪽으로 내려가 국수봉 북릉을 넘으면 분지로 가는 하산길이다. 이제 분지를 가로질러 맞은편 연화산을 오를 차례다.

은편중리에서 전원주택 단지를 지나면 본격적인 임도가 시작된다. 길이 빤하고 노면이 좋아 어렵지 않게 주능선에 올라서고, 서사면을 돌아 천전리 방면으로 신나는 다운힐을 즐긴다. 연화산은 특별할 것 없는 500m급 산이지만 동쪽에는 침식분지가, 서쪽에는 기이한 협곡지대가 형성되어 있고, 이 협곡에는 선사시대 암각화와 각석 등이 남아 있어 신비를 더한다.

임도를 내려가면 바로 나오는 천전리각석은 신석기시대부터 신라에 걸쳐 길이 9.5m, 높이 2.7m의 반듯이 다듬은 벽면에 각종 그림과 글씨가 새겨져 있다. 벽면은 위가 앞쪽으로 15도 기울어져 암각화가 보다 잘 보존되었다. 윗부분은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에 걸쳐 사람과 각종 짐승, 물고기, 기하학적 무늬 등이 새겨져 있다. 아래 쪽에는 신라 때 새겨진 것으로 인물과 배, 글씨 등이 보인다. 명문에는 신라 화랑과 귀족 이름이 등장해 왕실과 화랑이 즐겨 찾던 명승지로 추정된다. 지금 보아도 들판과 멀지 않으면서 세상과 단절된 듯한 협곡과 맑은 계류는 선경이다. 협곡 서편에 바로 언양 방면 들판이 펼쳐져 물은 산에서 들 쪽으로 흘러야 싶은데, 반대로 흐르는 것도 신기하다.

은을암 인근의 아름다운 숲길  

연화산 주능선에 오르면 삼거리가 나온다. 오른쪽 언양대곡 방면으로 가야 하며, 멧돼지 주의 안내판이 붙어 있다

연화산 서쪽 기슭에서 바라본 영남알프스 파노라마. 맨 뒤로 신불산(1159m)~간월산(1069m)~가지산(1241m) 줄기가 웅장하다

천전리 각석 방면으로 길고 장쾌한 다운힐이 시작된다. 왼쪽 멀리는 고헌산 

천전리각석은 신석기시대부터 신라에 걸쳐 길이 9.5m, 높이 2.7m의 반듯이 다듬은 벽면에 각종 그림과 글씨가 새겨져 있다. 벽면은 위가 앞쪽으로 15도 기울어져 암각화가 잘 보존되었다각석 아래쪽에 새겨진 글씨는 대부분 신라 때의 것으로 귀족과 화랑의 이름이 있어 이들의 유람터였음을 알 수 있다 

천전리각석에서 마치 하류 같은 상류 방면으로 나가면 KTX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두서면 들판으로 나가게 된다. 경부고속도로와 나란히 북상하다 인보리에서 우회전하면 대곡호 상류를 건너는 삼정교를 통과한다. 연화산 서쪽 자락을 길게 파고든 대곡호는 앞서 본 천전리각석의 상류로 태화강 줄기에 해당하며, 대도시 인근임에도 깊은 산중호수 분위기가 좋다.

삼정교를 건너 삼정교차로에서 다시 ‘천전리각석’ 방면으로 우회전하면 도로는 번듯한데 민가나 마을이 아예 없는 무인지경의 기묘한 산길이 시작된다. 길은 점점 좁아지다가 순천골저수지를 지나면 임도 수준으로 변하고 경사도 심해진다. 고도가 높아지고 조망이 트이니 저편으로 고헌산(1034m)이 영남알프스의 서막을 알리고 섰다.

해발 320m 임도삼거리는 앞서 천진리각석을 향해 다운힐을 시작했던 곳이다. 여기서 200여m 더 가서 왼쪽으로 오르면 연화산 정상 방면이다. 이윽고 해발 440m 지점에서 연화산 정상 업힐과 구미리 하산길이 나뉜다. 시간이 다소 늦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정상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오른쪽 경부고속도로와 나란히 가는 두서면 들길 

고요하면서도 산중호수의 신비가 어려 있는 대곡호

대곡호에서 연화산을 오르는 길. 마을도 인적도 아예 없는 적막강산이다

연화산 정상. 숲에 가려 조망은 트이지 않는다 연화산 활공장에서 북으로 바라본 경주 방면. 오른쪽 뒤로 남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연화산 그림자에 잠식되어가는 두동분지, 다랑논과 마을이 잘 어우러져 있다   

역시 고생한 보람이 있다. 연화산 정상은 방송사 중계탑이 있고, 정상석은 숲 속에 숨듯이 있어 조망이 트이지 않으나 바로 옆 활공장에 나서면 두동분지와 치술령, 국수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치술령과 국수봉에서 흘러내린 선상지는 수십겹 다랑논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가을의 풍요를 담은 마을들은 점점이 분지를 메우고 있다.

1600년 세월에 박제상과 치술부인의 슬픔은 증발해 버렸고 치술령과 분지는 오늘을 사는 사람과 뭇생명의 터전으로 남았을 뿐이다. 연화산의 거대한 그림자가 분지를 조금씩 잠식하며 황혼을 예고하고 있다. 북쪽 멀리 경주 분지와 남산이 희미하다.

 

tip

박제상유적지 근처와 분지 곳곳에 식당이 분포한다. 법왕사, 은을암, 연화산은 임도 수준의 길이 나 있으나 마지막에는 경사가 심하다. 치술령 정상은 따로 시간을 내서 등산으로 올라볼 것을 추천한다.

글/사진 김병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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