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번화한 연안 섬, 구도(求道)의 길목
삼여전망대에서 바라본 삼여도. 해안절벽 옆에 세 개의 바위섬이 모여 있고 뒤쪽으로는 망대봉 반도가 뻗어나 있다. 오른쪽 멀리 대소 매물도가 아득하다
섬 가는 길은 설렘이 배가된다. 떠남의 과정부터 외견상 3차원과 2차원을 넘나들어 다차원적이고, 정서적으로도 드라마틱하다. 섬으로 가는 길은 먼저 3차원 입체의 육지를 벗어나야 한다. 배에 오르면 2차원 평면인 바다 위로 옮겨가 ‘배’라는 ‘공간의 감옥’에 갇혀 꼼작 없이 이끌려가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한평면 위에서 무한자유를 만끽한다.
떠나온 육지는 뒤쪽으로 점점 멀어지지만 오랫동안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자동차든 비행기든 심지어는 자전거든, 어떤 육지의 탈것도 출발하는 순간 시점은 소실되어 이별의 정감을 반성할 틈도 없다. 목적지 역시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니 미지의 혼돈 속이다. 그러나 가야할 곳은 오래 전부터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도착과 만남의 정서는 서서히 점증하며 기대감을 키워간다. 섬 여행의 특별함은 바로 이별과 만남의 연장에서 시작된다.
미륵도 중화항을 떠나오는 길. 출항지가 오래도록 보여 배여행의 이별은 저 물결처럼 길기도 하다 귀항하는 어선 뒤에 갈매기 떼가 군졸처럼 따라붙었다
미륵도 중화항을 출항한 ‘욕지카훼리’는 아득히 보이는 섬을 향해 남하하고 있다. 그래봐야 20km 남짓이지만 욕지도는 남해 연근해에서 가장 외곽에 있는 섬 중 하나이고, 크기와 인구에서도 각별하다.
욕지도 가는 항로 주변은 수많은 섬들이 흩어져 해상의 신선경을 이룬다. 이 땅의 모든 섬들은 가라앉은 산봉우리여서 크건 작건 형태가 뚜렷하고 멀리서도 알아보기 쉽다. 저 많은 섬들 중에 가본 곳이 적지 않건만 미지의 장소도 숱하다.
갑판 좌우를 오가며 섬을 하나하나 불러본다. 서쪽으로는 추도 뒤로 사량도가, 욕지도 저편으로는 섬은 작은데 일대에서 가장 높은 천황산(471m)이 우뚝한 두미도가 단연 자연등대다. 이처럼 면적 대비 훌쩍 높은 고봉으로 이뤄진 두미도는 신안 가거도에 필적한다. 가거도는 길이 6km의 작은 섬에 독실산(573m)이 섬을 가득 채운다(독실산 정상석은 639m로 되어 있으나 573m가 맞다. 일제 때의 잘못된 측량 기록이 그대로 사용된 경우다). 두미도 천황산은 언젠가 올라볼 것이다.
욕지도가 가까워지면 섬무리, 군도가 시작된다. 앞의 대소 봉도 틈새로 아령처럼 가늘게 연결된 적도가 봉긋하다
항로 동쪽으로는 더 많은 섬들이 운집해서 때로 겹치고 빗겨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미륵도 남쪽으로는 학림도, 연대도, 내외 부지도가 열도를 이루고 그 뒤로는 장벽처럼 길쭉한 오곡도, 잘록한 비진도가 오버랩된다. 비진도 뒤로 멀리 대소 매물도가 아득하고 독도 같은 작은 바위섬인 소지도는 심해 중에 외롭다.
욕지도를 중심으로 밀집한 군도(群島)는 상하 노대도와 연화도 사이로 작은 섬들이 빽빽하다. 날씨가 좋아 연화도 저편으로 먼 바다의 바위섬인 국도가 아스라하다. 역시 평탄한 해상에서는 아주 멀리까지 쉽게 보인다.
욕지도 최고봉은 천왕봉(천왕산이라고도 함. 392m)이다. 두미도 천황산보다는 낮으나 수평선 위 스카이라인 위에서 입체감이 도드라진다. 인접한 두 섬에 ‘천왕봉, 천황산’ 같은 거산의 이름이 붙은 것은 이 광막한 바다 위에서 특별한 존재감을 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욕지항으로 접근 중인 선박의 마스트 뒤로 통신탑이 선 천왕봉이 보인다. 항구는 오목한 만 안에 숨어 있어 아직 보이지 않는다
욕지도(欲知島)는 이름에서 불교적인 여운이 느껴진다. 일설에는 불경에 있다는 ‘욕지연화장두미문어세존(欲知蓮華藏頭尾問於世尊)’ 구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풀이하자면, ‘연화장 세계의 모든 것을 알고 싶으면 세존에게 물어보라’는 뜻인데 연화장 세계는 화엄경에서 그리는 이상적인 불국토를 말한다. 화엄경에는 연화장 세계는 맨 아래에 풍륜(風輪)이 있고 그 위에 향수해(香水海)가 있다고 하며, 욕지도 일원의 바다를 이 향수해에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욕지도 주변에는 이 문장을 따 섬들을 명명해 연화도, 두미도, 세존도가 모두 존재한다. 옛사람들은 현실의 불국토를 꿈꾸면서 육지는 경주 남산, 바다는 욕지도를 대표적으로 생각한 것 같다.
욕지도는 면적 14.5㎢이며 인구는 1,900명 정도로 면적대비 많은 편이다. 욕지도 정도의 섬에 이렇게 인구가 많은 곳은 전국적으로 드물다. 6.25 때는 피난민이 몰려 2만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섬 동쪽으로 오목한 천혜의 항만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적당하다.
키큰 야자수가 남국의 풍취를 물씬 발한다. 부두 일원은 상당히 번화하다
욕지도는 근 20년 만이다. 욕지도가 고향인 부산 MTB랜드 김진홍 대표의 초청으로 그의 고향집에 머물며 섬을 돌아본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해안도로는 노면 상태가 좋지 않았고, 동쪽의 망대봉 반도에는 일주도로가 없어 낙도 분위기가 완연했는데 항구로 다가서며 바라보는 욕지항 일원은 상당히 번화한 모습이다. 언덕 위마다 펜션 같은 세련된 건물이 즐비하고 포구에는 배들이 가득 하며, 도로에는 자동차도 많다.
20년만에 보는 천왕봉은 그대로이건만 정상 옆 대기봉(355m)에 새로 생긴 전망대가 올려다 보인다. 천왕봉 동릉에 모노레일이 생겨 대기봉까지 편하게 오를 수 있게 된 덕분인데, 지금은 안전문제로 무기한 휴업중이다.
여객선이 닿을 때 섬 포구는 언제나 ‘잠깐 활기’가 넘친다.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과 차량이 오르내리고, 부두에는 이들을 기다리는 차량과 사람으로 왁자하다. 하지만 이런 활기는 5분 정도만에 썰물 빠지듯 싹 사라지고 평온한 일상을 회복한다.
북쪽 해안도로로 접어들었다. 바람이 거세지만 바다는 동해처럼 깊푸르고 탁 트인 풍광이 시원하다
따뜻한 남해안 섬답게 1월 중순인데도 산은 온통 진초록에, 부두에는 키 큰 야자수까지 하늘거려 남국의 분위기가 물씬하다. 부두를 낀 면소재지 마을은 상당히 크고 번화해서 온갖 가게와 편의시설이 모여 있고 건물들도 세련됐다.
섬은 해안을 따라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야 바닷가 쪽이라 밀림 같은 메밀잣밤나무숲을 돌아 동쪽으로 번화한 포구를 벗어난다. 20년 전의 기억을 돌이키면 완전히 달라진 것 같아 난생 처음 오는 곳처럼 생경하다.
북안으로 접어들면 응달이 지고 북서풍이 거세지면서 체감기온이 뚝 떨어지지만 한적한 분위기 속 경치는 더욱 발군이다. 바다는 동해처럼 깊푸르고 주위에 도열한 크고 작은 섬들은 밝은 햇살을 받아 따사롭다. 남해는 이것이 특징이자 매력이다. 동해처럼 바다는 맑고 깊은데 섬이 많아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다감하기도 하다. 섬 하나 없는 동해가 장쾌하나 냉혹하다면, 물이 얕고 탁하며 갯벌이 발달한 서해는 나른하다고 할까.
흰작살해수욕장은 사실상 없어졌고 호랑이바위는 북사면이 크게 잘려나가 그 아래에 캠핑장이 들어섰다.
욕지도 북안에서 바라본 섬무리. 앞에서부터 모도, 사이도, 막도, 납도 등으로 대부분 무인도다
길이 산허리로 올라붙자 섬들은 구름바다가 아니라 진짜바다 위에 뜬 봉우리가 되어 해상 선경을 이룬다. 섬마다 해안선은 파도에 씻겨 하얀 나신을 드러내고 있는데 모두 해식애(海蝕崖) 암벽이라 섬 자체가 바위 덩이임을 말해준다.
북안에서는 그냥 산붕이라 하나 바다 위로 우뚝한 두미도가 단연 시선을 끌고 방향과 위치를 알려주는 자연 등대가 된다. 북서단을 꺾어 돌면 거대한 돛이 꽂혀 있는 대송쉼터가 나온다. 서쪽으로 트여 노을이 아름답겠고 두미도 뒤편으로 남해도 금산(705m)이 흐릿하다.
다시 구비를 돌면 도동마을로 내려가는 긴 내리막이 구불거리고 정면으로 천왕봉이 들이닥친다. 도동 다음은 덕동인데, 20년 전 덕동에서 묵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잘록한 지협인 유동 남쪽으로 반도지형이 드라마틱하다. 해식애로 둘러싸인 반도는 별도의 섬을 겨우 면한 건지, 욕지도와 연결된 것을 다행스러워 하는 건지 모르겠다.
솔구지전망대에서 바라본 대송마을. 마을이 경사면에 자리해 전망이 좋고 마을 자체도 입체적이다. 왼쪽으로 상하 노대도를 마주하고 있다
닻 조형물이 있는 대송전망대. 두미도 천황산이 뾰족하고 안내판 뒤로는 남해도 금산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도동마을과 천왕봉 왼쪽 유동마을로 잘록하게 이어진 유동 반도. 오른쪽 희미한 섬은 먼 바다 초입의 갈도
유동을 지나면 길은 섬의 남안으로 접어들고 높직한 곳에 삼여전망대가 있다. 해식애에서 떨어져 나온 삼여도가 그림엽서 풍경이다. 작은 바위섬을 ‘여(礖)’라고 하는데 이름처럼 3개의 여가 돌출해 있다. 울릉도 해안의 삼형제섬과 비슷하고, 일대는 높이 50m 내외의 해식애여서 해상에서 보면 거제 해금강이나 백령도 두무진과 흡사한 절경일 것이다.
삼여전망대에서 700여m 가면 2000년 1월1일 주민들이 조성한 새천년기념공원이 있다.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기념하자는 뜻일 텐데 깊이 생각해보면 이 같은 시간의 ‘구획’은 땅 위의 국경이나 지역경계처럼 대단히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새천년은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한 것이고, 1년 역시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기간의 인간적 재단일 뿐이다. 우리는 마치 시간이 어떤 격자처럼 절대기준이 되고 그 바탕 위에 온갖 존재와 사건이 명멸한다고 간주한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원리에서 시간의 절대성을 부정하자,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시간은 가장 순수한 지속”이라며 상대성원리를 비판한 적이 있다. 지금은 실험적 증명으로 아인슈타인이 옳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현대의 양자물리학은 다시 상대성원리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이곳에 겨울이 온 적이 있던가. 야자수 가로수가 따사롭다
유동마을 즈음에서 뒤돌아본 천왕봉
인간의 사변능력에서 가장 심오하고 심지어 신비로운 대상은 결국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를 인식하는 자의식으로 귀결된다.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으로 둘을 통합해서 이해하지만 시간과 공간을 파고들면 최초와 최후, 최소와 최대의 개념에서 부닥치는 무한 앞에 좌절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나는 석가모니의 통찰을 떠올린다. 밝히지만 나는 불교도가 아니고 석가모니를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존재가 있을 때 유의미할 뿐 존재가 없을 때는 의미가 사라진다. 시간은 존재의 지속을 통해 느껴지고 공간은 존재의 크기를 통해 감각될 뿐이라는 것이다.
미시세계를 다루는 현대 양자물리학에서는 사물의 존재 개념 자체가 크게 흔들리는데, 관찰자의 유무가 존재를 결정한다는, 터무니없고 이상한 결과에 이른다. 둘을 조합하면, 존재가 시공간을 결정하고 존재는 관찰자가 결정한다는 논리가 가능하며, 결국은 관찰자(주관, 자의식)가 만물을 결정한다는 대단히 사변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결론에 이른다. 그런데 우리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자의식은 존재를 인식할 때만 생겨나기 때문에 존재와 의식은 상호 순환고리를 이루고, 어떻게 보면 둘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는 인류의 지성이 지금까지 사색과 관찰로 찾아낸 가장 심오하고 고차원적인 존재론일 것이다.
새천년기념공원에서 사색에 잠긴 나는 문득, 불교적 세계관을 이름으로 삼은 욕지도의 구도적 자극에 유념한다. 과거 어느 고승이 공감했기에 그런 이름을 붙였을 테니, 역시 평범한 섬이 아니다.
새천년기념공원의 기념비. 밀레니엄이 바뀐다고 세상이나 개인의 삶이 급변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인간이 부여한 인위적 질서일 뿐이다
욕지항을 호위하듯 자연 방파제가 되고 있는 망대봉 반도. 해안절벽을 따라 3개의 출렁다리가 놓여 있다
대기봉을 오르는 모노레일은 무기한 휴업 상태다
모노레일 승강장은 기약 없이 방치 상태다. 탈선 사고 이후 중단되었다는데 원래는 케이블카를 놓아야 맞지만 추진이 워낙 힘들어 모노레일로 대체해 이런 결과를 맞고 말았다. 거제 계룡산도 그렇고 안타까운 차선책, 모노레일이다.
저 앞으로 망대봉(205m) 반도의 해식애 해안을 따라 출렁다리 3개가 연이어 걸려 있다. 관광용으로 개설한 아이디어와 입지는 칭찬할 만하다. 전국적으로 출렁다리와 잔도(棧道) 조성이 붐인데 이 먼 섬에까지 여파가 닿았다.
20년 전 이 망대봉 반도는 욕지도 내에서도 오지였다. 좁고 험한 길이 통단 마을까지만 나 있었는데 어느새 순환도로가 뚫렸다. 하지만 폭우로 통단 마을 직전에서 50m 정도 유실되어 길이 끊기고 말았다(24년 1월 현재 복구공사중). 자전거는 살짝 들어서 통과하거나 통단마을로 내려가 우회할 수 있다.
망대봉 반도 동안에는 초미니의 노적마을과 통단마을뿐이라 지금도 자연 그대로의 오지 느낌이 물씬하고, 건너편 초도와 함께 해안절벽에는 원시미가 감돈다.
반도를 돌아 야포마을로 접어들면 저쪽으로 입항할 때 보았던 욕지항과 천왕봉이 성큼 다가선다. 입체적인 지형과 형형색색의 다채로움은 지중해의 어느 해변에 온 것만 같다.
가장 먼저 나오는 제3출렁다리.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 암반 위를 걸어볼 수 있다
제2출렁다리 뒤로 해안절벽 위를 지나는 일주도로가 보인다. 일주도로가 지나는 잘록한 산허리에 새천년기념공원이 있다
제1출렁다리(숲속에 교각이 보인다)는 도로에서 조금 들어가야 한다. 아찔한 절벽 위까지 갈 수 있어 인기가 높다
망대봉 반도 초입에서 통단마을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구불길망대봉 반도에서 바라본 욕지항 일원. 산줄기에 둘러싸여 천연의 항구를 이뤘고 마을과 포구 모두 상당히 크다
급사면 협곡에 비집고 들어선 노적마을. 건너편으로 초도의 해안절벽이 무시무시하다
욕지항에서 중화항으로 가는 귀로는 연화도를 들린다. 연화도와 반하도를 잇는 해상보행교가 헌칠하다. 다리 아래로 비진도가 멀지 않다
tip
욕지항 부둣가에 식당과 마트, 카페가 즐비하다. 해변에는 관광객 상대 횟집이 많다면 일반 식당은 마을 안쪽에 분포한다. 해안선을 따라 펜션도 많이 있다.
욕지도행 배편은 통영항(1일 5회), 통영 삼덕항(1일 7회), 통영 중화항(1일 6회)에서 있다. 50분~1시간 소요. 그 중 중화항이 조용한 편으로, 편도요금 7,600원(자전거 2,000원 별도).
글/사진 김병훈 대표
통영 욕지도 24.5km
가장 번화한 연안 섬, 구도(求道)의 길목
삼여전망대에서 바라본 삼여도. 해안절벽 옆에 세 개의 바위섬이 모여 있고 뒤쪽으로는 망대봉 반도가 뻗어나 있다. 오른쪽 멀리 대소 매물도가 아득하다
섬 가는 길은 설렘이 배가된다. 떠남의 과정부터 외견상 3차원과 2차원을 넘나들어 다차원적이고, 정서적으로도 드라마틱하다. 섬으로 가는 길은 먼저 3차원 입체의 육지를 벗어나야 한다. 배에 오르면 2차원 평면인 바다 위로 옮겨가 ‘배’라는 ‘공간의 감옥’에 갇혀 꼼작 없이 이끌려가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한평면 위에서 무한자유를 만끽한다.
떠나온 육지는 뒤쪽으로 점점 멀어지지만 오랫동안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자동차든 비행기든 심지어는 자전거든, 어떤 육지의 탈것도 출발하는 순간 시점은 소실되어 이별의 정감을 반성할 틈도 없다. 목적지 역시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니 미지의 혼돈 속이다. 그러나 가야할 곳은 오래 전부터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도착과 만남의 정서는 서서히 점증하며 기대감을 키워간다. 섬 여행의 특별함은 바로 이별과 만남의 연장에서 시작된다.
미륵도 중화항을 떠나오는 길. 출항지가 오래도록 보여 배여행의 이별은 저 물결처럼 길기도 하다 귀항하는 어선 뒤에 갈매기 떼가 군졸처럼 따라붙었다
미륵도 중화항을 출항한 ‘욕지카훼리’는 아득히 보이는 섬을 향해 남하하고 있다. 그래봐야 20km 남짓이지만 욕지도는 남해 연근해에서 가장 외곽에 있는 섬 중 하나이고, 크기와 인구에서도 각별하다.
욕지도 가는 항로 주변은 수많은 섬들이 흩어져 해상의 신선경을 이룬다. 이 땅의 모든 섬들은 가라앉은 산봉우리여서 크건 작건 형태가 뚜렷하고 멀리서도 알아보기 쉽다. 저 많은 섬들 중에 가본 곳이 적지 않건만 미지의 장소도 숱하다.
갑판 좌우를 오가며 섬을 하나하나 불러본다. 서쪽으로는 추도 뒤로 사량도가, 욕지도 저편으로는 섬은 작은데 일대에서 가장 높은 천황산(471m)이 우뚝한 두미도가 단연 자연등대다. 이처럼 면적 대비 훌쩍 높은 고봉으로 이뤄진 두미도는 신안 가거도에 필적한다. 가거도는 길이 6km의 작은 섬에 독실산(573m)이 섬을 가득 채운다(독실산 정상석은 639m로 되어 있으나 573m가 맞다. 일제 때의 잘못된 측량 기록이 그대로 사용된 경우다). 두미도 천황산은 언젠가 올라볼 것이다.
욕지도가 가까워지면 섬무리, 군도가 시작된다. 앞의 대소 봉도 틈새로 아령처럼 가늘게 연결된 적도가 봉긋하다
항로 동쪽으로는 더 많은 섬들이 운집해서 때로 겹치고 빗겨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미륵도 남쪽으로는 학림도, 연대도, 내외 부지도가 열도를 이루고 그 뒤로는 장벽처럼 길쭉한 오곡도, 잘록한 비진도가 오버랩된다. 비진도 뒤로 멀리 대소 매물도가 아득하고 독도 같은 작은 바위섬인 소지도는 심해 중에 외롭다.
욕지도를 중심으로 밀집한 군도(群島)는 상하 노대도와 연화도 사이로 작은 섬들이 빽빽하다. 날씨가 좋아 연화도 저편으로 먼 바다의 바위섬인 국도가 아스라하다. 역시 평탄한 해상에서는 아주 멀리까지 쉽게 보인다.
욕지도 최고봉은 천왕봉(천왕산이라고도 함. 392m)이다. 두미도 천황산보다는 낮으나 수평선 위 스카이라인 위에서 입체감이 도드라진다. 인접한 두 섬에 ‘천왕봉, 천황산’ 같은 거산의 이름이 붙은 것은 이 광막한 바다 위에서 특별한 존재감을 발하기 때문일 것이다.
욕지항으로 접근 중인 선박의 마스트 뒤로 통신탑이 선 천왕봉이 보인다. 항구는 오목한 만 안에 숨어 있어 아직 보이지 않는다
욕지도(欲知島)는 이름에서 불교적인 여운이 느껴진다. 일설에는 불경에 있다는 ‘욕지연화장두미문어세존(欲知蓮華藏頭尾問於世尊)’ 구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풀이하자면, ‘연화장 세계의 모든 것을 알고 싶으면 세존에게 물어보라’는 뜻인데 연화장 세계는 화엄경에서 그리는 이상적인 불국토를 말한다. 화엄경에는 연화장 세계는 맨 아래에 풍륜(風輪)이 있고 그 위에 향수해(香水海)가 있다고 하며, 욕지도 일원의 바다를 이 향수해에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욕지도 주변에는 이 문장을 따 섬들을 명명해 연화도, 두미도, 세존도가 모두 존재한다. 옛사람들은 현실의 불국토를 꿈꾸면서 육지는 경주 남산, 바다는 욕지도를 대표적으로 생각한 것 같다.
욕지도는 면적 14.5㎢이며 인구는 1,900명 정도로 면적대비 많은 편이다. 욕지도 정도의 섬에 이렇게 인구가 많은 곳은 전국적으로 드물다. 6.25 때는 피난민이 몰려 2만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섬 동쪽으로 오목한 천혜의 항만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적당하다.
키큰 야자수가 남국의 풍취를 물씬 발한다. 부두 일원은 상당히 번화하다
욕지도는 근 20년 만이다. 욕지도가 고향인 부산 MTB랜드 김진홍 대표의 초청으로 그의 고향집에 머물며 섬을 돌아본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해안도로는 노면 상태가 좋지 않았고, 동쪽의 망대봉 반도에는 일주도로가 없어 낙도 분위기가 완연했는데 항구로 다가서며 바라보는 욕지항 일원은 상당히 번화한 모습이다. 언덕 위마다 펜션 같은 세련된 건물이 즐비하고 포구에는 배들이 가득 하며, 도로에는 자동차도 많다.
20년만에 보는 천왕봉은 그대로이건만 정상 옆 대기봉(355m)에 새로 생긴 전망대가 올려다 보인다. 천왕봉 동릉에 모노레일이 생겨 대기봉까지 편하게 오를 수 있게 된 덕분인데, 지금은 안전문제로 무기한 휴업중이다.
여객선이 닿을 때 섬 포구는 언제나 ‘잠깐 활기’가 넘친다.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과 차량이 오르내리고, 부두에는 이들을 기다리는 차량과 사람으로 왁자하다. 하지만 이런 활기는 5분 정도만에 썰물 빠지듯 싹 사라지고 평온한 일상을 회복한다.
북쪽 해안도로로 접어들었다. 바람이 거세지만 바다는 동해처럼 깊푸르고 탁 트인 풍광이 시원하다
따뜻한 남해안 섬답게 1월 중순인데도 산은 온통 진초록에, 부두에는 키 큰 야자수까지 하늘거려 남국의 분위기가 물씬하다. 부두를 낀 면소재지 마을은 상당히 크고 번화해서 온갖 가게와 편의시설이 모여 있고 건물들도 세련됐다.
섬은 해안을 따라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야 바닷가 쪽이라 밀림 같은 메밀잣밤나무숲을 돌아 동쪽으로 번화한 포구를 벗어난다. 20년 전의 기억을 돌이키면 완전히 달라진 것 같아 난생 처음 오는 곳처럼 생경하다.
북안으로 접어들면 응달이 지고 북서풍이 거세지면서 체감기온이 뚝 떨어지지만 한적한 분위기 속 경치는 더욱 발군이다. 바다는 동해처럼 깊푸르고 주위에 도열한 크고 작은 섬들은 밝은 햇살을 받아 따사롭다. 남해는 이것이 특징이자 매력이다. 동해처럼 바다는 맑고 깊은데 섬이 많아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다감하기도 하다. 섬 하나 없는 동해가 장쾌하나 냉혹하다면, 물이 얕고 탁하며 갯벌이 발달한 서해는 나른하다고 할까.
흰작살해수욕장은 사실상 없어졌고 호랑이바위는 북사면이 크게 잘려나가 그 아래에 캠핑장이 들어섰다.
욕지도 북안에서 바라본 섬무리. 앞에서부터 모도, 사이도, 막도, 납도 등으로 대부분 무인도다
길이 산허리로 올라붙자 섬들은 구름바다가 아니라 진짜바다 위에 뜬 봉우리가 되어 해상 선경을 이룬다. 섬마다 해안선은 파도에 씻겨 하얀 나신을 드러내고 있는데 모두 해식애(海蝕崖) 암벽이라 섬 자체가 바위 덩이임을 말해준다.
북안에서는 그냥 산붕이라 하나 바다 위로 우뚝한 두미도가 단연 시선을 끌고 방향과 위치를 알려주는 자연 등대가 된다. 북서단을 꺾어 돌면 거대한 돛이 꽂혀 있는 대송쉼터가 나온다. 서쪽으로 트여 노을이 아름답겠고 두미도 뒤편으로 남해도 금산(705m)이 흐릿하다.
다시 구비를 돌면 도동마을로 내려가는 긴 내리막이 구불거리고 정면으로 천왕봉이 들이닥친다. 도동 다음은 덕동인데, 20년 전 덕동에서 묵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잘록한 지협인 유동 남쪽으로 반도지형이 드라마틱하다. 해식애로 둘러싸인 반도는 별도의 섬을 겨우 면한 건지, 욕지도와 연결된 것을 다행스러워 하는 건지 모르겠다.
솔구지전망대에서 바라본 대송마을. 마을이 경사면에 자리해 전망이 좋고 마을 자체도 입체적이다. 왼쪽으로 상하 노대도를 마주하고 있다
닻 조형물이 있는 대송전망대. 두미도 천황산이 뾰족하고 안내판 뒤로는 남해도 금산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도동마을과 천왕봉 왼쪽 유동마을로 잘록하게 이어진 유동 반도. 오른쪽 희미한 섬은 먼 바다 초입의 갈도
유동을 지나면 길은 섬의 남안으로 접어들고 높직한 곳에 삼여전망대가 있다. 해식애에서 떨어져 나온 삼여도가 그림엽서 풍경이다. 작은 바위섬을 ‘여(礖)’라고 하는데 이름처럼 3개의 여가 돌출해 있다. 울릉도 해안의 삼형제섬과 비슷하고, 일대는 높이 50m 내외의 해식애여서 해상에서 보면 거제 해금강이나 백령도 두무진과 흡사한 절경일 것이다.
삼여전망대에서 700여m 가면 2000년 1월1일 주민들이 조성한 새천년기념공원이 있다.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기념하자는 뜻일 텐데 깊이 생각해보면 이 같은 시간의 ‘구획’은 땅 위의 국경이나 지역경계처럼 대단히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새천년은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한 것이고, 1년 역시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기간의 인간적 재단일 뿐이다. 우리는 마치 시간이 어떤 격자처럼 절대기준이 되고 그 바탕 위에 온갖 존재와 사건이 명멸한다고 간주한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원리에서 시간의 절대성을 부정하자,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시간은 가장 순수한 지속”이라며 상대성원리를 비판한 적이 있다. 지금은 실험적 증명으로 아인슈타인이 옳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현대의 양자물리학은 다시 상대성원리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이곳에 겨울이 온 적이 있던가. 야자수 가로수가 따사롭다
유동마을 즈음에서 뒤돌아본 천왕봉
인간의 사변능력에서 가장 심오하고 심지어 신비로운 대상은 결국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를 인식하는 자의식으로 귀결된다.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으로 둘을 통합해서 이해하지만 시간과 공간을 파고들면 최초와 최후, 최소와 최대의 개념에서 부닥치는 무한 앞에 좌절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나는 석가모니의 통찰을 떠올린다. 밝히지만 나는 불교도가 아니고 석가모니를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본다. 그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존재가 있을 때 유의미할 뿐 존재가 없을 때는 의미가 사라진다. 시간은 존재의 지속을 통해 느껴지고 공간은 존재의 크기를 통해 감각될 뿐이라는 것이다.
미시세계를 다루는 현대 양자물리학에서는 사물의 존재 개념 자체가 크게 흔들리는데, 관찰자의 유무가 존재를 결정한다는, 터무니없고 이상한 결과에 이른다. 둘을 조합하면, 존재가 시공간을 결정하고 존재는 관찰자가 결정한다는 논리가 가능하며, 결국은 관찰자(주관, 자의식)가 만물을 결정한다는 대단히 사변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결론에 이른다. 그런데 우리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자의식은 존재를 인식할 때만 생겨나기 때문에 존재와 의식은 상호 순환고리를 이루고, 어떻게 보면 둘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는 인류의 지성이 지금까지 사색과 관찰로 찾아낸 가장 심오하고 고차원적인 존재론일 것이다.
새천년기념공원에서 사색에 잠긴 나는 문득, 불교적 세계관을 이름으로 삼은 욕지도의 구도적 자극에 유념한다. 과거 어느 고승이 공감했기에 그런 이름을 붙였을 테니, 역시 평범한 섬이 아니다.
새천년기념공원의 기념비. 밀레니엄이 바뀐다고 세상이나 개인의 삶이 급변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인간이 부여한 인위적 질서일 뿐이다
욕지항을 호위하듯 자연 방파제가 되고 있는 망대봉 반도. 해안절벽을 따라 3개의 출렁다리가 놓여 있다
대기봉을 오르는 모노레일은 무기한 휴업 상태다
모노레일 승강장은 기약 없이 방치 상태다. 탈선 사고 이후 중단되었다는데 원래는 케이블카를 놓아야 맞지만 추진이 워낙 힘들어 모노레일로 대체해 이런 결과를 맞고 말았다. 거제 계룡산도 그렇고 안타까운 차선책, 모노레일이다.
저 앞으로 망대봉(205m) 반도의 해식애 해안을 따라 출렁다리 3개가 연이어 걸려 있다. 관광용으로 개설한 아이디어와 입지는 칭찬할 만하다. 전국적으로 출렁다리와 잔도(棧道) 조성이 붐인데 이 먼 섬에까지 여파가 닿았다.
20년 전 이 망대봉 반도는 욕지도 내에서도 오지였다. 좁고 험한 길이 통단 마을까지만 나 있었는데 어느새 순환도로가 뚫렸다. 하지만 폭우로 통단 마을 직전에서 50m 정도 유실되어 길이 끊기고 말았다(24년 1월 현재 복구공사중). 자전거는 살짝 들어서 통과하거나 통단마을로 내려가 우회할 수 있다.
망대봉 반도 동안에는 초미니의 노적마을과 통단마을뿐이라 지금도 자연 그대로의 오지 느낌이 물씬하고, 건너편 초도와 함께 해안절벽에는 원시미가 감돈다.
반도를 돌아 야포마을로 접어들면 저쪽으로 입항할 때 보았던 욕지항과 천왕봉이 성큼 다가선다. 입체적인 지형과 형형색색의 다채로움은 지중해의 어느 해변에 온 것만 같다.
가장 먼저 나오는 제3출렁다리.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 암반 위를 걸어볼 수 있다
제2출렁다리 뒤로 해안절벽 위를 지나는 일주도로가 보인다. 일주도로가 지나는 잘록한 산허리에 새천년기념공원이 있다
제1출렁다리(숲속에 교각이 보인다)는 도로에서 조금 들어가야 한다. 아찔한 절벽 위까지 갈 수 있어 인기가 높다
망대봉 반도 초입에서 통단마을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구불길망대봉 반도에서 바라본 욕지항 일원. 산줄기에 둘러싸여 천연의 항구를 이뤘고 마을과 포구 모두 상당히 크다
급사면 협곡에 비집고 들어선 노적마을. 건너편으로 초도의 해안절벽이 무시무시하다
욕지항에서 중화항으로 가는 귀로는 연화도를 들린다. 연화도와 반하도를 잇는 해상보행교가 헌칠하다. 다리 아래로 비진도가 멀지 않다
tip
욕지항 부둣가에 식당과 마트, 카페가 즐비하다. 해변에는 관광객 상대 횟집이 많다면 일반 식당은 마을 안쪽에 분포한다. 해안선을 따라 펜션도 많이 있다.
욕지도행 배편은 통영항(1일 5회), 통영 삼덕항(1일 7회), 통영 중화항(1일 6회)에서 있다. 50분~1시간 소요. 그 중 중화항이 조용한 편으로, 편도요금 7,600원(자전거 2,000원 별도).
글/사진 김병훈 대표
통영 욕지도 24.5km